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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丙喆

丙喆

1894. 10. 8 ~ 1970.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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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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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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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4년 10월 8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안성군 원곡면·양성면(陽城面)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만세시위는 3월 28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4월 1일에는 두 지역의 연합 만세시위로 발전하였는데, 1919년 4월 1일 안성군의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4월 1일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등으로부터 당일 밤에 면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벌이자는 계획을 전달받았다. 이날 밤 마을 주민들과 함께 원곡면 면사무소 앞에 모였으며, 이때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도자들은 원곡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또한, 주도자들은 양성면으로 이동하여 주민들과 함께 강도 높은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만세시위의 선두에 남길우를 앞세우고 양성면을 향해 가면서 일제 식민통치를 성토하며 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이날 밤 9시 경부터 양성면에서도 수백 명의 주민들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은 양성면으로 오는 원곡면의 만세시위대와 합류하여 2,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만세시위대는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고, 안으로 침입하여 집기들을 파손시키고, 최은식의 주도로 주재소에 불을 질러 건물을 완전히 소실시켰다. 이후 양성우편소와 양성면의 면사무소, 일본인 도자토 도요테(外里與手) 상점과 다카 히데토모(隆秀知) 집 등으로 행진하여 돌을 던지고, 건물 안의 집기와 기물들을 가지고 나와 불태우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자정이 넘도록 양성면에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4월 2일 새벽 4시 경 원곡면으로 돌아와 해산하였다. 이와 같은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된 이틀 후인 4월 3일 일제는 조선주차군 제79연대 소속의 군경 30여 명을 원곡·양성 지역으로 출동시켜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조사,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파악되어 안성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로 인해 이른바 내란죄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일제의 고등법원은 “1920년 3월 22일 만세시위가 소요죄(騷擾罪)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라고 판결하고, 경성지방법원을 관할 법원으로 지정하여 돌려보냈다. 이에 대해 경성지방법원이 8월 10일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을 선언함에 따라 재판은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진행되었다. 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 방화죄 등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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