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炳鎭
炳鎭1888. 11. 18 ~ 1949. 9.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8년 11월 18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현 안성시)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이병렬(李炳烈)·이경전(李敬全)을 사용하였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안성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에서는 1919년 3월 28일부터 각각 만세시위가 본격화되어 독립적으로 지속되고 있었는데, 4월 1일 원곡면과 양성면에서는 두 지역 주민들의 연합으로 2,0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날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위대의 선두에 섰다. 4월 1일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등으로부터 만세시위 제안을 받았다. 마을의 이한기(李漢基)·이성률(李聖律) 등과 함께 만세시위 계획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원곡면 면사무소로 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대는 원곡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주민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시켰다. 이에 고무된 이유석 등 주도자들은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 일제의 주요 기관들이 위치한 양성면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적극 호응하여 선두에 면장 남길우를 앞세운 시위 대열에 참여하여 양성면을 향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이날 밤 9시경부터 수백 명의 양성면의 주민들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의 만세시위가 끝나갈 무렵, 양성면으로 다가오는 원곡면의 만세시위대를 만나 합류하여 더욱 대대적이고,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2,000여 명 규모로 확대된 시위대는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양성우편소와 조선인들에게 원성이 높았던 일본인 도자토 도요테(外里與手) 상점과 다카 히데토모(隆秀知) 집을 차례대로 가서 공격하고 방화하는 등의 방법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 시위 이틀 후인 4월 3일 일제는 조선주차군 제79연대 병력을 비롯한 30여 명의 군경을 원곡과 양성 지역으로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조사,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안성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른바 내란죄의 혐의로 고등법원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만세시위가 소요죄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라고 판결하고, 경성지방법원을 관할 법원으로 지정하여 돌려보냈다. 그러나 경성지방법원이 8월 10일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을 선언함에 따라 재판은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진행되었다. 재판 결과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 방화죄를 이유로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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