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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文旭

文旭

1885. 5. 26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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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文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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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안악(安岳)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안악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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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안악군 은홍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2) 1885년 5월 26일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은홍면(銀紅面) 학산리(鶴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그 해 3월 11일 은홍면 온정리(溫井里) 온정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일제히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안악군(安岳郡) 은홍면(銀紅面)에 거주하는 개신교 신자인 사립 선명학교(善明學校) 교장 박치간(朴治幹)·유용원(柳龍源)·정계로(鄭啓老)는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서 서울에 갔다가 3월 1일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3월 11일 은홍면 온정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후 매일 밤 유용원·박치간·정계로 등은 유용원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곳에서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고 시위 당일 배포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그리고 은홍면·대행면(大杏面)과 서하면(西河面)의 개신교 교회 신자들과 접촉해서 만세운동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11일 오전 11시 무렵 온정리 교회 영수 이정엽(李正燁)의 집 정원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인 이정엽 집 정원 만세시위에 참석하였다. 그곳에서 박치간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시위대와 함께 정의와 인도에 의거하여 질서 정연하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였다. 서약을 끝낸 후, ‘대한독립’이라는 글이 쓰여 있는 큰 기를 앞세운 시위대 행렬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면서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장터로 진입하자, 장터에 모여있던 사람들도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지역 일대를 행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가 헌병주재소 앞을 지나가자 1명의 일본인 헌병과 2명의 한국인 헌병보조원이 ‘대한독립’이라고 쓰여진 대형 깃발을 압수하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으며, 시위대 선두에 있었던 박승도(朴承道)가 헌병들의 총검을 빼앗고, 한국인 헌병보조원을 꾸짖으면서 총대로 그를 구타하였고 시위대는 일본인 헌병을 제압하고자 하였다. 그 장면을 목격한 일본인 헌병대가 시위대를 향해서 일제히 발포하였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면서 일본 헌병대의 무력 진압에 저항하였지만,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박승도·전인식(全仁植)·김학규(金學圭)가 현장에서 사망하였으며, 정계로를 비롯한 20여 명이 총탄을 맞고 중경상을 입었다.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에 대한 체포에 나섰고, 시위 종료 후에도 시위 가담자들을 색출하였다. 은홍면 온정장터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제 군경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1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해서 만세를 불렀음에도 보안법 위반 내지는 소요죄로 처벌하고, 그에 비해서 군중들을 사살 혹은 부상을 입힌 일본 헌병들을 무죄로 적용”하는 것을 개탄하면서 상고하였다. 1919년 9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고, 1920년 9월 6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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