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武鍾
武鍾1893. 5. 14 ~ 1956. 9.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울주군 언양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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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3년 5월 14일 경상남도 언양군(彦陽郡,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남면(上南面) 길천리(吉川里)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어린 시절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이후 천도교도가 되었다. 1922년 사립양정학원(私立養正學院)을 설립하고 교편을 잡았다. 1924년 신문화운동 단체 사시회(四時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같은 천도교인인 이규인(李圭寅)·이성영(李成榮)·강경찬(姜庚贊)·최해선(崔海璇)·이규경(李圭庚) 등과 함께 울주군 최초의 만세시위였던 1919년 4월 2일 언양면(彦陽面)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울주군의 만세운동은 천도교도가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상북면 거리(巨里)에는 천도교 울산교구가 위치하여 울주군은 천도교의 영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규인·이성영·강경찬·최해선 등과 함께 사전에 서울의 천도교 본부와 연락을 취하며 민족대표 진영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아 만세운동을 조직하였다. 당시 천도교 울산교구장이었던 김교경(金敎慶)은 2월 하순 고종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김교경은 서울에 머물면서 3월 1일 이래 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자, 천도교의 비밀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과 『국민회보(國民會報)』를 등사하여 울산교구로 보냈다. 또한 김교경은 뒤이어 서울로 상경한 이규장에게 급히 필사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여 지역에서의 만세운동 조직을 당부하였다. 귀향한 이규장을 통해 김교경이 보낸 독립선언서와 함께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과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을 조직하라는 당부를 전달받고, 최해규·이규장·이규천·곽해진(郭海鎭)·유철순(兪哲淳)·이규인(李圭寅) 등과 함께 논의하여 언양면의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들과의 비밀회의에서 만세운동의 거사일을 언양 장날인 4월 2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거사를 이틀 앞둔 3월 31일 최해규·곽해진·유철순이 일제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만세운동 계획의 사전 발각이 우려되었으나, 이때 체포되지 않은 이규인·이성영·강경찬·최해선·이규강과 논의하여 계획의 변경없이 예정대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다음날인 4월 1일 밤 길천리에 소재한 이규인 소유의 빈집에 모여 만세시위에서 주민들에게 배포할 태극기 42개를 제작하였다. 이날 인근의 양산면에서 수천 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만세시위 전개되었다는 소식에 만세시위에 대한 결의는 더욱 앙양되었다. 4월 2일 동지들과 함께 언양면의 남부리(南部里) 장터로 나갔다. 장터에는 인근의 상남면(上南面)·중남면(中南面) 및 양산의 하북면(下北面) 등지에서 온 많은 주민들로 붐비고 있었다. 일제 경찰은 요시찰인으로 지목하고 있던 정병한(鄭炳漢)을 주재소로 구인하는 등 장날의 만세시위에 대비하여 면소재지의 요소요소에 삼엄한 경계망을 펼치고 있었다. 이규인·이성영·강경찬 등 동지들과 태극기를 품속에 숨겨 남부리 장터의 중심 도로로 나와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선창하였다. 만세시위에 공감한 장터의 주민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따라 외치면서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만세시위대의 규모는 순식간에 1,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에 이규인·이성영·강경찬·최해선·이규강 등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하여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남부리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의 발생을 경계하던 장터에서 순식간에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제 경찰이 곧바로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해산을 명령하며, 주도자로 보이는 인물들을 강압적으로 체포하여 언양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강압적인 일제 경찰의 형태에 분노한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언양주재소로 행진하여 연행자의 석방 요구하는 시위를 전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이에 대해 시위대를 위협하는 공포탄의 발사로 대응하였다. 이에 와 같은 일제 경찰의 태도는 시위대가 분노를 참을 수 없도록 자극했고, 분노한 주민들은 곧바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는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이들을 지휘하여 주재소로 쳐들어가 일제 경찰들의 무장해제를 시도하였다. 이렇게 만세시위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일제 경찰은 비무장의 시위대를 향해 실탄 사격을 감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2명의 주민이 일제 경찰의 흉탄에 피격되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동지들과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1922년 울산군 상남면의 천도교회관에 사립 양정학원(養正學院)을 설립하고 교편을 잡았다. 1924년 천도교인들과 함께 사시회(四時會)를 조직하고 신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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