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夢石
夢石1898. 5. 11 ~ 1929. 9.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4)
관련 사건
- · 1919년 3월 동래군 구포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4) 1898년 5월 11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구포면(龜浦面) 남산리(南山里, 현재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에서 출생했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9일 동래군 구포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구포면 만세운동은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이었던 양봉근(楊奉根)의 권유를 받은 구포면 면사무소의 서기 임봉래(林鳳來)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1919년 3월초 임봉래는 양봉근으로부터 서울 등지의 만세운동의 상세한 상황과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 이와 동시에 고향인 구포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켜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받은 임봉래는 만세운동의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감하여 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임봉래로부터 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윤경(尹涇)과 유기호(柳基護)가 가장 먼저 동지로 결합하였고, 이후 이들은 동지들을 확대해 나가면서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3월 27일과 28일 임봉래·윤경·유기호를 중심으로 구포리(龜浦里)에 위치한 박영초(朴永初)와 이수련(李守連)의 집에서 회합하여 구포 장날인 3월 29일을 만세운동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이후 주도 인물들은 밤을 새워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고, 수백 장의 태극기를 제작하고, 넓은 폭의 광목으로 만세시위의 선두에 세울 대형 태극기 1기와 큰 글씨로 ‘독립만세’라고 쓴 현수막도 만들었다. 이와 같이 임봉래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이들로부터 장날의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박덕홍(朴德弘)·손진태(孫晋泰) 등과 함께 그 취지에 공감하여 적극적인 참여를 결의하고, 만세시위가 시작되면 주민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는 역할을 맡았다. 3월 29일 오전 박덕흥 등과 함께 사전에 전달받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품속에 숨기고, 구포장터로 향하였다. 낮 12시경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품속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며, 임봉래 등의 지휘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모습을 보고 공감한 주민들이 만세운동에 동참해 오자, 시위대는 순식간에 1,000여 명의 규모가 되었다. 만세시위의 기세가 오르자, 임봉래 등의 지휘에 따라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구포면사무소로 행진하여 면장 윤영태(尹永台)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면사무소의 만세시위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제 경찰이 김옥겸 등 11명의 주도 인물들을 강압적으로 체포하여 연행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일제 경찰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임봉래 등의 지휘에 따라 구속된 동지들을 석방하라고 외치면서 시위대에 참여한 주민들과 함께 일제 경찰의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고, 집기를 파손하는 등 다른 주민들과 함께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000여 명이 넘는 만세시위대가 주재소와 일제 경찰을 공격하자, 당황한 일제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총기를 발포하며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9명의 주민들이 일제 경찰의 총탄에 부상당했고, 임봉래·손진태 등 40여 명의 주요 참가자들과 함께 붙잡혔다. 같은 해 8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났다.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 약 5개월간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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