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明奉
明奉1864. 2. 12 ~ 1925. 1.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관련 사건
- · 1919년 3월 함흥군 함흥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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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5) 1864년 2월 12일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 부내면(府內面) 동천리(東川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그 해 3월 3일 함흥군 함흥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함남 함흥군에는 2월 28일 무렵 서울의 독립선언과 만세운동 계획이 전해졌다. 2월 28일 오후 9시 무렵 함흥면 중하리의 개신교 예배당에서는 학생, 지역주민, 그리고 개신교인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함흥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하기 위해서 한영호(韓泳鎬)·이순기(李舜基)·이근재(李根栽)·이영화(李榮華) 등을 준비위원으로 정하였다. 아울러 함흥면 시장의 장날인 3월 3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날 모임에 참여한 인사들은 만세시위에 사용하기 위해서 각자 5원씩을 갹출하였다. 3월 1일과 2일 이근재·한영호·한임(韓林) 등은 함흥면을 돌아다니면서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시위 전날인 3월 2일에는 이근재 집에서 조영신이 원산에서 확보한 독립선언서 3,000장을 인쇄하고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그런데 3월 2일 밤에 함흥경찰서에서 영생중학교 학생들이 3월 3일 만세시위를 주도적으로 참여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3월 3일 오전 10시경 일제 경찰들은 학생 88명을 검속하고 시위 당시 배포하려고 갖고 있었던 독립선언서 600장을 압수하였다. 경찰들의 사전 검속에도 불구하고 3월 3일 정오 무렵 함흥 읍내 대화정(大和町)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이에 합류하였다. 영생중학교, 함흥농업학교, 함흥고등보통학교, 영생여학교 학생을 비롯한 1,000명의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읍내 일대를 행진하였다. 함흥면에서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함흥경찰서는 쇠갈고리로 무장한 소방대와 곤봉을 소지한 군인을 시위 현장에 출동시켰다. 일제 군경과 소방대는 폭력을 행사하면서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고, 시위에 참여한 인사 150여 명을 연행하였다. 일제 경찰은 시위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부상자들이 선교사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도록 통제하기도 하였다. 이후 함흥면의 상인들은 철시 시위를 단행하였으며, 영생학교, 함흥고등보통학교, 함흥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은 만세시위에 동조하는 동맹휴학을 일으켰다. 이러한 과정 중에 일제 군경에 의해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이에 항소한 결과, 같은 해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을 취소하고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본인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기초하는 의사발동으로 범죄가 아니”라면서 상고하였으나, 그해 9월 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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