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孟三
孟三1867. 11. 7 ~ 1919. 4. 1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2)
관련 사건
- · 1919년 4월 제천군 제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2) 1867년 11월 7일 충청북도 제천군(堤川郡) 금성면(錦城面) 동막리(東幕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이희민(李喜敏)·이익삼(李益三)이 있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7일 일어난 제천군 제천장터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위대의 선두에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제천군 만세운동은 제천군의 잠업계(蠶業係)의 조수로 근무하고 있던 이범우(李範雨)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범우는 고종 장례에 제천군 대표단 중 한사람으로 참례하게 되었다. 이범우는 서울로 상경하여 체재하는 동안 서울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결심으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제천은 강원도 남부와 충청북도 북부의 물화가 모이는 중심지였다. 이 때문에 일제는 3월 1일 이래 제천에 경찰력 외에 수비대를 상주시켜 엄중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일제의 감시와 경계가 엄중한 상황에서 장용근(張用根)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과 이범우가 주도한 두 만세운동이 제천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제천공립보통학교(堤川公立普通學校)의 졸업생 장용근은 이 학교의 졸업생과 중퇴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태극기 1,050본을 제작하였으나, 일제 경찰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태극기는 압수되고, 장용근 등 13명 전원이 체포되었다. 4월 13일 이범우는 평소 시국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있던 봉양면(鳳陽面) 삼거리(三巨里) 사는 권종필(權鍾弼)을 찾아가 만세운동에 대한 서울의 상황을 전달하고, 제천에서의 만세운동을 제안하였다. 이에 권종필이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동지로 결합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킬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약 4일 뒤인 4월 17일 장날이었던 제천장터에서 다시 권종필을 만나 주점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장용근 등 제천공립보통학교의 졸업생과 중퇴생들이 만세시위를 계획하다가 일제 경찰에 사전 발각되어 체포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분노하여 지금 바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서로 의견 일치를 보게 되었다. 곧바로 제천장터의 한복판으로 나와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오후 6시 경, 이범우와 권종필 등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에 나와 있던 1,000여 명의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제천장터에 나와 있다가 ‘대한독립만세’의 구호와 함께 위해 만세시위에 동참하라는 이범우 등의 호소를 듣게 되었다. 이범우 등이 열변을 토하며 주장하는 만세운동의 취지에 공감하여 주변에 있던 주민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따라 외치면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범우 등의 지휘에 따라 시위대열을 짓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제천장터의 곳곳을 행진한 후, 제천경찰서로 갔다. 일제 경찰과 수비대는 무장한 상태로 만세시위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만세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경찰서 앞으로 행진해 오자, 일제 경찰은 즉시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미 기세가 오른 시위대는 이를 거부하였고, 시위대의 선두로 나가 솔선하여 더욱 격렬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일제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의 총탄에 복부가 관통당하는 중상을 당했다. 현장에서 사망하지는 않았으나, 총상으로 고통 받다가 다음날인 4월 18일 새벽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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