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萬集
萬集1876. 7. 7 ~ 1944. 6. 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9)
관련 사건
- ·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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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9) 1876년 7월 7일 경상북도 경주군(慶州郡)에서 태어났다.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나, 1899년 경주읍(慶州邑)에서 선교사 안의와(安義窩, James Edward Adams)와 만난 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후 대구부(大邱府) 남성정(南城町, 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에 거주하였다. 1906년 안의와가 설립한 대구의 계성학교(啓聖學校)에 한문 교사로 초빙되어 활동하였다. 대구 남성정교회(南城町敎會)에서 교인으로 생활했다. 1909년 7월 남성정교회의 장로(長老)가 되었으며, 1910년 부해리(傅海利, Henry Munro Bruen)선교사의 조사(助事)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12년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1914년 12월 남성정교회를 나와, 남산정교회(南山町敎會)를 설립하였다. 1917년 6월 19일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9월 9일 남산정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18년 남성정교회 홍승한(洪承漢) 목사가 중국으로 떠남에 따라, 2월 10일 후임 목사로 취임하였다. 같은 해 9월 15일에는 교남기독청년회(嶠南基督靑年會)를 조직하였다. 교남기독청년회는 대구의 YMCA 조직으로, 민족의식을 가진 조선인 교도(敎徒)와 교사가 참여하여 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대구 지역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2월 24일과 25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던 이갑성(李甲成)과 회합을 하였다. 장소는 남성정교회였다. 대구의 이상백(李相伯)과 백남채(白南埰)도 함께하였다. 이갑성은 만세운동의 준비 상황을 전달하고, 지역 인사를 포섭하고자 시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즉각적인 참여를 결정하지 않았다. 만세운동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월 26일 이갑성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문진(金文珍)을 대구에 파견하여 운동에 참여를 요청하였으나 확답을 전하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하였다. 이갑성이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보내왔다. 3월 3일경 독립선언서와 취지서를 수령하였다. 또한 신문을 통해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이에 대구에서도 만세운동에 호응하기로 결정하였다. 남산정교회 조사 김태련, 신정교회(新町敎會) 장로이자 계성학교 교사 김영서(金永瑞)와 모여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하였다. 3월 8일 오후 3시 대구 서문시장(西門市場)에서 만세를 부르고, 시내를 행진하기로 결정하였다. 김태련에게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태극기 등을 복사하여 당일 배포할 것을, 김영서에게는 신정교회와 계성학교의 학생·교인에 대한 설득을 지시하였다. 또한, 직접 만세운동에 참여할 동지를 모았다. 이로서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鄭在淳), 정광순(鄭光淳),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을 비롯한 대구지역의 교인과 학생 다수가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9년 3월 8일 김태련과 함께 사람들을 이끌고 서문시장에 진입하였다. 오후 3시부터 군중을 향해 연설을 시작하였다. 한국은 독립할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독립을 희망한다고 외치면 자연히 독립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연설을 마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으며, 시장에 모인 사람들은 이를 따라 불렀다. 700여 명에 달하는 만세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라고 적은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하였다. 시장을 출발하여 본정(本町)·경정(京町)·동성정(東城町)을 행진하였다. 오후 3시 30분경 만세대열이 동성정 3정목(町目)에 이르렀다. 대구경찰서와 헌병분대에서 파견한 병력은 시위대를 공격하였다. 군중은 해산되었고,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157명과 함께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어 법원으로 넘겨졌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는데, 같은 해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일부 취소 후 다시 징역 3년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1년 풀려난 뒤, 남성정교회에서 목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계성학교 학생의 동맹휴학을 지지한 사건을 계기로 선교사와의 갈등이 불거졌다. 이에 경북노회(慶北老會) 측과 오랜 기간 법적 분쟁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1923년 3월 ‘자치선언’으로 선교사들로부터의 ‘자치교회’를 추구하다가 선교사 영향 아래 있던 경북노회에서 1923년 4월 제명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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