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基豊
基豊1895. 1. 13 ~ 1976. 1.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봉산군 서종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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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5년 1월 13일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서종면(西鍾面) 원장리(園墻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으며, 3월 11일 봉산군 서종면 단장리(丹墻里)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평양(平壤)·안주(安州)·의주(義州)·선천(宣川)·원산(元山)·진남포(鎭南浦)에서 만세시위가 일제히 시작되었다. 황해도 봉산군 사원면(沙院面)에 위치한 사리원(沙里院)은 경의선(京義線)과 황해선(黃海線)이 분기하는 지역이며, 황주군(黃州郡)·서흥군(瑞興郡)·재령군(載寧郡) 등과도 인접한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인근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만세운동 소식이 빨리 전파되었고, 3월 3일 기독교도인 등 500여 명이 사리원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같은 마을의 진학철(陣學哲)과 함께 3월 11일 인접한 사리원의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계획하고, 거사에 사용할 태극기도 사전에 제작하였다. 또한 봉산군 사인면(舍人面) 만화리(萬和里)에 위치한 예수교회당의 조사(助事) 박기영(朴基永)과도 연락을 취하면서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3월 11일 오전 9시경 기독교인 30여 명과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단장리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사리원 장터로 향하는 장꾼들과 사람들이 합류하여 시위대는 2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단장리에서 강경하게 진압하였으며, 이후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이들의 사리원 장터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서 검문을 강화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5월 2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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