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基定
基定1883. 7. 5 ~ 1955. 3. 1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제1차 유림단
- · 제2차 유림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제2차 유림단 의거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3년 7월 5일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월항면(月恒面) 대산리(大山里)에서 이용희(李鏞熙)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충부(忠夫)이고, 호는 이재(邇齋)이다. 일찍이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한학을 닦았다. 1905년 을사늑약 때 오적(五賊)을 성토하고 참형을 주장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에 즈음하여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단식을 하였으나 가족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구국 방책을 강구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전념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려는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에 참여하였다. 송준필(宋浚弼)·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송홍래(宋鴻來)·이기형(李基馨) 등과 함께 그 연락 본부를 성주의 백세각(百世閣)으로 정하고 자신이 먼저 서명한 다음, 각처 유림으로부터 서명받은 독립청원서를 김창숙이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지고 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3월 29일 백세각에서 송준필이 제작한 「국내통고문(國內通告文)」을 각처로 배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장석영·성대식 등과 함께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대가면(大家面) 옥화동(玉花洞)의 교회 조사 유진성(兪鎭成), 초전면(草田面) 동포동(東浦洞)의 기독교인 오임오(吳任吾) 등을 규합하여 4월 2일 만세시위를 함께 전개하기로 하였다. 4월 2일 오후 1시 성주면 경산동(京山洞)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성주읍 시장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호응하여 시장 중앙에 모였던 유림 측의 송우선(宋祐善)·송회근(宋晦根)·송수근(宋壽根)·송훈익(宋勳翼)·송문근(宋文根)·이봉희(李鳳熙) 등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 만세시위에서 일제 경찰의 발포로 이태희(李兌熙)와 성명 미상의 2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이봉희(李鳳熙)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 경찰이 주동 인물을 검거할 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어 무죄로 풀려났다. 1926년 베이징(北京)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창숙의 지령을 받고 귀국한 영주 출신의 송영호(宋永祜)를 도와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이다. 이 사건의 중심이었던 김창숙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동삼성(東三省) 일대에 한인 교포들의 집단거주지를 마련하여 이곳에서 산업을 추진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국내로 진공하기 위한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에 국내의 유림들은 김창숙을 도와 모금운동을 하다가 600여 명이 투옥되었다.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전력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저술로 망국의 아픔을 기록한 『채양록(蔡陽錄)』 2권이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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