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起胤
起胤1898. 9. 9 ~ 1938. 6.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관련 사건
- · 대구부 덕산정시장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2) 1898년 9월 9일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 풍각면(豊角面) 차산동(車山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용석(李用石)이다. 1919년 당시 경북 달성군(達城君) 공산면(公山面) 도학동(道鶴洞) 동화사(桐華寺) 산하의 지방학림(地方學林, 현 동화사 승가대학(僧伽大學))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그 해 3월 30일 대구 덕산정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의 인사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 2인이었다. 당시 한용운은 중앙학림(中央學林, 현 동국대학교)의 강사였고, 중앙학림의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이후 학생들은 각자 자신의 고향에 있는 사찰이나 연고가 있는 지역의 사찰로 돌아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에 불교계에 의해서 각 지방의 대표 사찰로 만세운동이 확산되었다. 당시 중앙학림에서 수학하고 있던 달성군 공산면 진인동(眞仁洞) 출신의 윤학조(尹學祚)가 대구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동화사로 내려왔다. 그리고 동화사 지방학림의 후배인 권청학(權淸學)·김문옥(金文玉) 등을 만나서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소식을 알리고 만세시위를 펼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이들은 공산면 백안동(百安洞)에 있는 백안시장(百安市場)에서 거사를 단행하기로 계획하였지만, 공간이 협소하고 인원도 적다고 판단하여 대구 쪽에서 실행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28일 동화사 지방학림의 학생인 김문옥은 동학들을 심검당(尋劍堂)에 모아 놓고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보여 주었다. 이에 권청학·김윤섭(金潤燮)·김종만(金鍾萬)·박창호(朴昌鎬)·이보식(李普湜)·이성근(李成根)·허선일(許善一)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단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3월 30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당일 대구 덕산정시장(德山町市場, 현 남문시장)에 모이기로 하였다. 3월 29일 동화사 지방학림의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거사를 하루 앞두고 포교당(布敎堂)인 보현사(普賢寺)의 김상의(金尙義) 집에서 다음 날 만세시위에 사용할 작은 태극기를 종이로 만들고, 흰 천에 태극기를 그려 큰 깃발을 만들었다. 3월 30일 오후 2시 김상의의 집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출발해 덕산정시장으로 이동하였고, 도착한 이후 준비한 작은 태극기를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배부하였다. 학생들이 큰 태극기를 나부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앞장섰다. 이에 장사하는 사람들과 주민들이 뒤를 따랐다. 약 3,000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시장 곳곳을 천천히 걸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일제 군경이 덕산정시장에서 행진하고 있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시위대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그리고 시위대 맨 앞에서 만세를 연호하던 권청학·김문옥·김윤섭·김종만·박창호·이보식·이성근·허선일 등과 함께 주도인물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같은 해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부분 취소되었으나 다시 징역 10월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7월 13일 대구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