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基元
基元1885. 4. 21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제1차 유림단 의거(파리장서)
- · 1919년 성주군 성주면 만세운동
- · 제2차 유림단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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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5년 4월 21일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월항면(月恒面) 대산리(大山里)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자는 자건(子乾)이며, 호는 삼주(三洲)이다. 이명은 이세원(李世元)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주리론(主理論)적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친손이고, 한주학파를 계승하며 한말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하고 1908년 이후 연해주(沿海州)와 중국 내 여러 지역에서 유인석(柳麟錫)·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전념한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의 장자이다. 어머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이고, 부친과 망명한 이후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친 이기인(李基仁)이 동생이다. 1919년 유림의 파리장서 운동을 지원하였고, 같은 해 4월 2일 성주면에서 거행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다양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는데, 특히 1925년 제2차 유림단 의거와 1926년 나석주(羅錫疇) 의거의 자금 모집과 지원에 참여하였다. 1919년 독립선언서에 참여하지 못한 유림은 파리강화회의에 직접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당시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제기될 수 있음을 예상한 일제가 이미 이완용(李完用)·김윤식(金允植) 등을 앞세워 「독립불원서(獨立不願書)」를 성·서명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러한 친일파 유림의 행동에 전국의 유림은 심한 모욕감을 느끼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유림이 나서야 한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조부의 제자인 곽종석(郭鍾錫) 등의 영남 유림과 김복한(金福漢) 등의 호서 유림을 중심으로 전국의 유림은 한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진정한 의사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전하기 위해, 총 2,674자로 이루어진 장문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부친의 문인이었던 김창숙(金昌淑)이 「독립청원서」 제출을 위한 유림의 대표로 선정되었고, 파리로 직접 가서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김창숙이 중국 상하이(上海)에 도착한 이후 여러 사정으로 「독립청원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해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인쇄된 영문본과 한문본은 각국 대표와 공사관으로 발송되고,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1916년 중국 펑텐(奉天, 현 선양(瀋陽))에서 사망한 부친의 사후 정리와 조부의 『한주집(寒洲集)』 중간(重刊)에 매진하던 중 곽종석과 김창숙 등으로부터 독립청원운동의 내용과 「독립청원서」를 전달받았지만, 파리장서의 1차 서명자 137명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부와 부친의 문인들을 통해 파리장서를 전파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후 송회근(宋晦根)·송준필(宋俊弼)·이기정(李基定)·장석영(張錫英) 등의 유림과 함께 성주에서의 만세시위 계획에 참여하였다. 4월 2일 오후 1시경부터 성주 읍내의 장날을 이용하여 유림과 유진성(兪鎭成) 등 기독교 세력이 함께 전개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경산동(京山洞) 관제묘(關帝廟) 뒷산에 모인 기독교도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시장에 모여 있던 유림 등 사람들과 함께 성주경찰서를 공격하는 등 대대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12일 송회근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파리장서사건이 발각되었다. 이 일로 4월 30일 곽종석 등 다른 관련자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지만, 조선총독부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유림들이 연루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파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여 최대한 이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려 한 결과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1925년 3월 김창숙이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이때 곽종석의 문집을 출판하기 위해 곽윤(郭奫)·김황(金洸)·하장환(河章煥) 등과 상경하여 있다가, 김창숙에게 자금 모집과 조달에 대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후 영남 유림들의 군자금 20만원 모금운동에 송영우(宋永祐)·손후익(孫厚翼)·김화식(金華植)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6년 12월에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의 의거에 소요되는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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