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명석
琴明石1894. 8. 19 ~ 1961. 5.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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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4년 8월 19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북면(臨北面) 사월동(沙月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봉화(奉化)이며, 자는 병원(秉元)이다. 안동의 독립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3일부터 3월 27일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일어났으며, 1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3월 17일부터 23일까지가 절정기로 군내 19개면 중 11곳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임동면 시위는 3월 3월 고종 장례식에 참석했던 류동시(柳東蓍)가 돌아오면서 준비되었다. 류동시는 영남의 거유(巨儒)라 불리는 류치명(柳致明)의 증손이었다. 그는 임동면 수곡동(水谷洞)에 있는 협동학교(協東學校)의 류동태(柳東泰)와 이균호(李均鎬), 그리고 류연성(柳淵成)과 만세 시위 준비를 협의하였다. 협동학교에서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3월 15일 임동면에 있는 편항시장(鞭巷市場) 공동 타작장에서 류곡란(柳谷蘭)·류교희(柳敎熙)·류연성·류동수(柳東洙)·박재식(朴載植)·박진성(朴晋成)·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 등이 모여 3월 21일 편항시장 장날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약속하였다. 류연성은 대곡동(大谷洞)과 위동(渭洞), 류동수는 마령동(馬嶺洞), 이강욱과 홍명성은 갈전동(葛田洞), 류곡란·박재식·박진성은 편항시장 부근, 류교희는 박곡동(朴谷洞)과 수곡동(水谷洞)에서의 주민 동원을 맡았다. 3월 21일 오후 1시쯤 편항시장에서 먼저 기독교인 10여 명이 독립 만세를 불렀다. 오후 2시쯤 류연성을 비롯한 10여 명의 주동자들이 시장 가운데 등장하였다. 류연성의 연설이 끝난 후 주동자들이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열렬히 호응하였다. 이때 우치다(內田) 순사가 이를 제지하다가 주재소로 몸을 피하자 500여 명의 시위대도 주재소로 향하였다. 시위대는 주재소로 들어가 무기를 빼앗아 우물에 버리고 서류를 파기하였으며, 우치다 순사와 권택석(權泰奭) 순사보를 구타하고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오후 5시경에는 면사무소로 몰려가 건물과 집기를 파괴하였다. 시위대는 다음 날 새벽 2시가 되어서야 해산하였다. 곧바로 안동경찰서에서 급파된 순사부장 1명, 수비대 군인 8명이 도착하여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3월 21일 임동면 편항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한 후 권영석(權寧奭)·권오규(權五圭)·권태환(權泰煥)·김일선(金日先)·배방우(裵方于)·이응팔(李應八)·천점백(千占伯)·천치락(千致洛) 등과 함께 다음 날인 3월 22일 오후 2시쯤 이웃에 있는 임북면(臨北面) 사월동(沙月洞)으로 갔다. 임북면 사람들과 합세하여 면사무소에 몰려가 사무실과 숙직실을 모두 부수고 서류를 파기한 후 오후 5시쯤 자진 해산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요, 건조물손괴, 가택침입, 상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오히려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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