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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璣榮

璣榮

1873. 6. 23 ~ 1946.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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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璣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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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永同)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영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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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동군 학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3년 6월 23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학산면(鶴山面) 봉소리(鳳韶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3일 학산면 서산리(鋤山里) 호미실장터에서 펼쳐진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학산면에서는 1919년 3월 29일 첫 만세시위 이후 4월까지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때 일제의 노동력 수탈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이 폭발하여 여러 차례의 만세운동에서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양상으로 표출되었다. 3월 29일 학산리(鶴山里)의 주민 2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관공서를 공격한 만세시위가 있었고, 다음날인 3월 30일에는 이웃한 양산면(陽山面) 가곡리(柯谷里)의 인천 이씨(仁川李氏) 가문의 이채연(李彩然)·이관연(李觀然)·이헌주(李憲周)의 주도로 도로 공사에 동원된 양산면과 학산면의 주민들이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3일의 서산리 호미실장터 만세시위는 양봉식(梁鳳植)을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양봉식은 서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9년 2월 진남포(鎭南浦)를 통해 귀국한 후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을 할 생각으로 민족 대표 중 정춘수(鄭春洙)로부터 독립선언서 수십 장을 받아서 귀향하였다. 양봉식을 통해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독립선언서를 제시하며 학산면에서의 만세시위를 양봉식이 제의하자, 이건양(李建陽)·정해용(鄭海容)·전만표(全萬杓)·전재득(全在得)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동지로 결합하여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이들과 함께 만세시위의 거사일을 호미실장터의 장날인 4월 3일로 결정하였다. 4월 3일 오후 4시경 양봉식·이기영·전재득 등과 함께 면소재지인 서산리의 호미실장터로 나갔다. 장터의 한복판에서 양봉식을 중심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장터에 나온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공감하여 300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자,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면서 장터의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양봉식 등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면사무소 앞으로 가서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면사무소 앞에 수백 명의 시위대가 운집한 가운데 양봉식은 “바야흐로 지금은 주민이 조밥을 먹기도 힘든 때에 비싼 뽕나무 묘목을 강제 배부하려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이니 이것을 처분하자”고 외치었다. 이에 시위대가 환호하며 적극적으로 동의하자, 이들을 지휘하여 면사무소 구내에 임시로 심어 놓은 뽕나무 묘목 약 2만 8천 그루를 뽑아 대부분을 소각하였다. 이후 시위대를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서산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고, 사무실과 숙직실의 집기·비품류를 모두 파괴하는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붙잡혀 1919년 8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9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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