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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箕聖

箕聖

1891. 12. 2 ~ 1976.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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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箕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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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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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덕군 창수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1년 12월 2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오촌동(梧村洞)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19일 창수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창수면 만세시위는 창수동 구장인 이수각(李壽珏)과 신기동(新基洞) 구장인 이현설(李鉉卨)을 비롯하여 권재형(權在亨)·이현우(李鉉祐)·박치운(朴致雲)·이현석(李鉉奭)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寧海面) 성내동시장(城內洞市場)과 병곡면(炳谷面) 읍내에서 대규모의 만세시위가 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창수면에서도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9일 영양군(英陽郡) 출신의 양반 이종구(李鐘龜)는 창수면 오촌동(梧村洞)·삼계동(三溪洞) 주민들과 함께 영해면으로 가다가, 신기동에서 이현설과 주민들을 만났다. 이들과 협의한 결과 영해면으로 가는 것을 중지하고 창수면 내에서 자체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다른 오촌동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목적지가 창수동으로 변경되자 시위대와 함께 창수경찰관주재소를 향하여 이동하였다. 신기동을 떠날 당시 참여 인원은 200여 명이었다. 이는 신기동 주민들 가운데 도로공사로 인한 토지 강제수용 문제로 인하여 일제의 통치 방식에 불만을 품은 자가 다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만세시위 참여 권유에 주민 다수가 적극 호응하여 시위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이호발(李浩發)·이기석(李箕奭)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동참해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주재소로 나아갔다. 한편, 시위대의 목표는 창수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주재소 경찰들은 이미 전날 영해면 만세시위에서 여러 관공서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이에 대비해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후 4시경 시위대가 주재소에 도착할 즈음 규모가 400여 명으로 증가하였기 때문에 주재소 경찰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시위대는 미리 준비해온 곤봉이나 도끼 등의 무기를 사용하고, 돌을 던지거나 맨손으로 달려들어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때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돌을 던지며 주재소로 돌진해 공격에 가담하였다. 시위대의 공격으로 주재소의 건물과 기숙사 등의 창, 벽, 천장과 게시판, 문등, 변소, 목욕탕 등이 파괴되었고, 청사에 딸린 유치장의 기둥, 주재소 뜰의 수목, 기타 서류와 기구 등이 파손되었다. 또한 주재소에 비치되어 있던 총 3정과 경찰 대검 2개, 경찰 소유의 가구, 의류, 식기 등도 훼손되었다. 오후 7시경 시위대는 만세시위의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판단하고 해산하였다. 하지만 귀가한 이후 진행된 일제 경찰의 검거 과정에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공무집행 방해죄, 건조물 손괴죄, 기물 손괴죄, 공문서 훼기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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