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奎淵
奎淵1880. 3. 1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장진군 신남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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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2) 1880년 3월 1일 함경남도 장진군(長津郡) 신남면(新南面) 신하리(新下里)에서 태어났다. 만세운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14일 장진군 신남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장진군은 교통이 불편하여 만세시위 소식이 늦게 전달되었다. 따라서 장진군의 만세운동은 인근 지역에 비해 늦은 1919년 3월 14일 시작되었다. 3월 14일 오후 4시 신남면 고토리(古土里) 수시(水市)에는 인근 만풍리(萬豊里)·신중리(新中里)·신하리·신흥리(新興里)·중흥리(中興里) 등에서 모인 2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하였다. 이때 같은 신하리의 한태제(韓泰濟), 고토리의 최정하(崔正夏)·한창순(韓昌順), 만풍리의 한하용(韓夏鏞), 신중리의 김면숙(金冕淑)·김상락(金尙洛), 중흥리의 윤복민(尹福民)·이병찬(李炳燦)·이우승(李愚昇)·최안재(崔安在)·한계유(韓啓維)·한면각(韓冕珏)·한승풍(韓承豊)·한영태(韓永泰)·한창혁(韓昌赫)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집결한 시위대는 고토리 헌병주재소로 행진하였고,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일부 시위대는 주재소로 들어가 장진과 함흥(咸興)을 연결하는 전화선을 절단하였다.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기 위해 칼과 몽둥이를 휘둘렀고, 이에 대항하면서 시위대는 주재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일제 헌병의 발포로 인해 시위대 2명이 사망하였다. 전신 시설이 파괴되어 외부로 연락이 불가능하자, 헌병보조원 1명이 주재소를 탈출하였다. 탈출한 헌병보조원은 고토리 헌병주재소의 헌병 하사 1명과 헌병보조원 2명, 그리고 보리 수매차 함흥군에서 파견된 창고 근무원 1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헌병대에 거짓 보고를 하였다. 이에 신남면의 면소재지인 하갈우리(下碣隅里)에 있던 하갈우리 헌병대주재소는 고토리로 헌병들을 급파하였다.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시켰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 100여 명이 붙잡혔다. 시위대 200여 명 가운데 100여 명이 붙잡히는 초유의 탄압은 장진군에서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3월 14일 일제 헌병의 체포 과정에서 김면숙·김상락·윤복민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었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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