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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圭錫

圭錫

1897. 12. 16 ~ 1950.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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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圭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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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咸安)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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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함안청년회
  • · 함안협동조합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함안군 함안읍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7년 12월 16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함안면(咸安面) 대산리(大山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백삼(李伯三)이다. 1919년 3월 함안군 함안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함안면 만세시위는 고종 장례식에 참여하고 돌아온 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 등이 대산면(代山面)의 한문 교사인 안지호(安知鎬) 등과 연락을 취하며 준비되었다. 거사일은 함안면 장날인 3월 19일로 결정하였다. 태극기 제작, 독립선언서 복사,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망 구축 등 사전 준비가 이루어졌다. 1919년 3월 19일 정오 비봉산(飛鳳山)에서 고천제(告天祭)를 올리고, 태평루(太平樓)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때 동참하였으며,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장날을 맞이하여 읍내에 나온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동참하면서 최초 수백 명이었던 시위대는 삽시간에 3,000명까지 늘었다. 군중들은 단순히 만세만 부르며 행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제 식민 지배의 상징적 기관들에 돌과 기와 조각을 던지고, 내부로 진입하여 물리력을 행사하였다. 함안군청, 함안 경찰관 주재소, 일본인 학교, 우체국, 법원출장소 등이 그 대상이었다. 특히 조용규(趙龍奎)·이종찬(李鍾瓚)·안혁중(安赫中)·백낙삼(白樂三) 등과 함께 함안 경찰관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내부로 진입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는 한편, 곤봉과 몽둥이 등으로 기물을 부수는 등 시위를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함안 주재소 순사부장과 마침 그 때 주재소에 출장을 와 있던 마산경찰서장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하였다. 함안 주재소 경찰들은 지원 출동한 마산(馬山)경찰서 경찰과 합세하여 시위대 진압에 나섰으나 군중의 규모가 급격히 불어나고, 기세가 높아 만세 군중을 해산할 수 없었다. 결국 일본군 수비대에 출동 요청을 하였고, 마산 중포병대대가 도착하여 총검에 의한 폭력적 진압에 나서, 본격적인 시위 주도자 체포 작전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도자 중 한 사람으로 붙잡혔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조용규·백낙삼·안재원(安在遠)과 함께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1919년 8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에는 1925년 함안청년회 재창립 당시 창립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27년 동아일보 함안지국 기자, 1929년 함안협동조합 발기인, 조합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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