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圭東
圭東1894. 2. 15 ~ 1984. 5. 3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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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4년 2월 15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의 경주 이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이후영과 어머니 김씨 슬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이명은 백삼(伯三)이다. 함께 만세운동에 참가한 이규완(李圭完)은 동생이다. 일제 측 기록에 따르면 5년간 서당에서 공부하였다. 판결문에는 직업이 농업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9년 4월 1일 안성군의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 일대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하고 학생들이 시내에서 만세를 외치며 궐기하자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안성 각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원곡면과 양성면 일대 주민들 역시 3월 28일부터 동리 단위로 모여 뒷산 등지에서 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는 평화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등은 3월 31일 만세시위를 해산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튿날에 다시 모여 면사무소와 주재소 등 일제의 통치기관을 공격하고, 안성에서 일본인들을 쫓아내자고 하였다. 칠곡리에 거주하던 이유석과 홍창섭은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만세운동 계획을 전하였는데, 이때 두 사람에게 계획을 듣고 동생 이규완과 함께 취지에 공감하여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4월 1일 오후 8시 다른 주민들과 함께 원곡면 외가천리(外加川里)의 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였다. 1,000여 명에 달한 군중은 이덕순과 이근수(李根洙)의 인솔 하에 횃불을 들고 만세를 외치며 동항리(東恒里)의 주재소를 향해 행진한 뒤, 오후 10시 주재소를 포위하였다. 주재소의 일제 경찰들은 만세시위에 동참하라는 권유를 받자 이를 거부하고 도주하였는데, 군중들은 주재소의 외벽과 창문에 돌을 던져 파괴하였다. 이때 소지하고 있던 돌을 던져 주재소의 유리문을 파괴하고 내부로 돌입한 뒤, 다른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의 책상과 의자를 부수고, 내부의 서류를 소각하였다. 최은식 등이 주재소 건물을 불태우자, 군중들과 함께 양성우편소(陽城郵便所)로 가서 건물의 외벽을 파괴하였고, 남현서(南玄西)로부터 우체국의 서류를 건네받아 불에 태웠다. 이후 일본인 잡화상 소토 사토요테(外里與手)의 집으로 가서 건물을 파괴하고 조경수(趙敬秀) 등과 함께 안에 있던 물건들을 모아 소각하였다. 군중들과 함께 이튿날인 4월 2일 오전 4시까지 만세를 외치고, 원곡면사무소에 불을 질러 건물을 소각한 이후 해산하였다. 이후 일제는 용산 주둔 일본군 병력까지 동원하여 6월까지 2달간 시위 참가자들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검속하였다. 일제 군경은 야간에 마을을 습격해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고, 가옥에 불을 지르는 등 무자비한 수단을 동원하여 참가자들을 연행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형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일제는 원곡면과 양성면의 만세운동이 식민통치에 조직적·전면적으로 항거하였다는 이유로 내란죄 성립 여부를 심의하기 위해 해당 사건을 고등법원에 배당하였고, 1920년 3월 22일 내란이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경성지방법원에 재배당하였다. 1920년 8월 10일 다시 경성지방법원에서의 결정을 통해 경성복심법원으로 재판권이 옮겨졌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와 우체국 등을 파괴·방화하였으며, 민가에 무단침입하여 내부의 물건을 손괴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2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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