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權秀
權秀1894. 12. 8 ~ 1937. 12. 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대덕군 유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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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4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大德郡) 유성면(儒城面) 지족리(智足里, 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지족동)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지역의 유림(儒林)으로 활동하였다. 친형인 이상수(李祥秀)와 함께 1919년 3월 16일 유성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유성면에서는 3월 16일 유성장터에서 최초의 만세시위가 전개된 이래 4월 초까지 여러 차례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상수와 함께 유성면 최초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서울의 독립선언식 이래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고 있다는 내용을 파악하고, 이에 크게 공감하였다. 유성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 이상수와 함께 유성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상수와 협의하여 인근 지역에서 많은 주민들이 모이는 유성장터의 장날인 3월 16일을 만세시위의 거사일로 정하였다. 3월 15일 자신의 집에서 멀리서도 볼 수 있는 대형 태극기 1장, 그리고 만세시위대가 손에 들고 휴대할 수 있는 작은 태극기 17장 등을 제작하며 다음날의 만세시위에서 사용할 시위물품을 스스로 준비하였다. 만세운동 거사일인 3월 16일 아침, 전날 제작한 대형 태극기를 자신의 동리인 지족리의 중심부 높은 곳에 게양한 후 이상수와 함께 소형 태극기를 가지고 유성장터로 향하였다. 예상대로 유성장터에는 많은 주민들이 나와 있었다. 이에 장터 한복판으로 나가 큰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선창하여 주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 장터의 주민들을 향해 “조선이 이번에 독립하게 되어 참으로 기쁜 일이니,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우리와 함께 소리 높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라고 열정적으로 연설하였다. 이와 같이 만세시위에 참여하라는 연설을 듣고, 독립의 취지에 공감한 많은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속속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이상수와 함께 준비한 소형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수의 주민들이 참여하여 만세시위대의 규모가 갖춰지자, 이상수와 함께 주민들을 지휘하여 시위대열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유성시장 곳곳을 행진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유성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장날의 시위 발생을 경계하고 있던 일제 헌병대가 출동하여 즉시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계속적으로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들에게 만세시위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이상수와 함께 붙잡혀서 연행되었다. 일제 헌병대의 조사과정을 거쳐 이상수와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징역 1년 2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즉각 항소하였다. 같은 해 5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의 일부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동일하게 징역 1년 2개월을 받았다. 이에 “무릇 사람을 사람이라고 칭하는 것은 삼강과 오륜을 수용하는 것이니, 신하가 그 군주를 존중하지 않고, 자식이 그 어버이를 경애하지 않고, 부인이 지아비를 공대하지 않으면 어찌 금수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본인도 마땅히 군주의 훙거에 통한의 심정으로 있다가 한국이 독립된다는 말을 듣고 기쁜 마음에 대중과 동락(同樂)하는 의미로 만세를 외치고 헌병에게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보안법 위반이라고 하여 징역 1년 2월에 처해졌으니 이것이 어찌 법률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는 취지로 다시 상고하였다. 그러나 그해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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