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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敎善

敎善

1892. 9. 4 ~ 1941.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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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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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靑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관련 사건

  • ·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4) 1892년 9월 4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광생리(光生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청양군 정산면 정산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정산면의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과 논의하여 면사무소 소재지인 서정리(西亭里) 정산시장의 장날인 1919년 4월 5일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계획하였다. 홍범섭 등은 4월 5일 오후 3시부터 서정리의 정산시장에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장날의 만세시위를 경계하고 있던 일제 헌병대가 곧바로 출동하여 즉시 해산을 명령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을 청양헌병분견소(靑陽憲兵分遣所)로 강제 연행하였다. 장날 시장에 나왔다가 일제 헌병들이 만세시위 주도자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하는 모습에 분노하여 주변의 다른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7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와 함께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 권흥규(權興圭)의 지휘에 따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헌병주재소로 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시위대의 선두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던 권흥규가 일제 헌병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다음날인 4월 6일 권흥규의 시신 운구를 위해 헌병주재소로 갔다. 시신 운구를 위해 권흥규의 친인척 및 전날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이면서 운구행렬은 대규모가 되었다. 운구행렬의 선두에는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는 명정(銘旌)이 서고, 많은 만장(輓丈)이 줄을 이었다. 운구가 지나가는 연로 각 마을에서도 상여를 대고 또 곳곳에서 노제를 올리고 통곡하며 속속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다. 지곡리(池谷里)를 경유할 즈음 운구행렬 속에서 태극기가 배포되었고, 곧이어 ‘조선독립만세’의 절규가 터져 나오면서 권흥규의 운구는 그 자체가 만세시위로 전환되었다. 이에 일제는 정산의 헌병대와 함께 청양 및 공주(公州)의 헌병들까지 정산으로 파견하였다. 공주에서 출동한 일제 헌병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운구행렬을 보자마자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여 권흥규의 조카딸 최윤안(崔胤安)과 명정을 쓴 권영진(權寧鎭), 상여꾼 김국삼(金國三)·유행길(柳行吉) 등 또다시 여러 사람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참극이 일어났다. 이날의 시위 이후 만세시위 참여자 색출에 나선 일제 헌병에 붙잡혀서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1919년 4월 22일의 즉결심판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한 점이 인정되어 이른바 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태(笞) 90도(度)를 받는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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