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의석
尹宜錫1901. 6. 29 ~ 1977. 12.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4월 홍성군 장곡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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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1년 6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 화계리(花溪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윤상석(尹相石)이다. 1919년 4월 홍성군 장곡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홍성군 장곡면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유학하던 윤익중(尹益重)·윤낙중(尹樂重) 형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윤익중 형제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생각으로 1919년 3월 20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당숙인 윤익중 형제로부터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전해 듣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세시위 계획을 논의하였다. 4월 4일을 만세시위 거사일로 결정하고, 화계리를 중심으로 광성리(廣城里)·신풍리(新豊里) 등의 인근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4월 4일 마을 주민 100여 명과 함께 매봉산으로 올라갔다. 오수남(吳壽男)이 종을 치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횃불을 밝히고, 농악을 울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횃불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7일 화계리 마을 앞산에서 소집한 주민 회합에 참석하던 중, 재차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가송리(佳松里)의 김동하(金東河)를 중심으로 김용제(金用濟)·김동완(金東完)·김용숙(金容肅)·이화춘(李化春)·한상철(韓相喆) 등이 주도하여 새로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김동하가 화계리의 마을 앞산에서 소집한 주민 회합에 윤익중 형제와 함께 참석하였다. 이 회합에서 김동하는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앞서 전개되었던 횃불만세시위를 계승하여 면사무소 앞으로 가서 만세시위를 하자고 격렬하게 연설하였다. 이에 많은 주민들이 호응하여 동참하였다. 김동하의 지휘에 따라 다른 주민들과 함께 시위 대열을 조직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면사무소 소재지인 도산리(道山里)로 행진하였다. 도산리로 가는 길목에서 광성리와 가송리의 주민들이 합류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기 직전 그 뒷산인 응봉산(鷹峰山)에서 독립에 대한 서로의 열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한상철이 일제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설명하였다. 이에 주민들은 북을 치면서 호응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규탄 집회를 마친 뒤 김동하의 지휘에 따라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김동하가 “면사무소 직원이 한명도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하여 면사무소를 부수라고 외치며 선두에서 돌을 던지기 시작함에 김동완·김용숙·이화춘·김차제·한상철 등과 함께 뒤따라 투석(投石)하였다. 이에 다른 주민들도 돌과 몽둥이 등으로 정문 기둥을 부수고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면사무소의 각종 시설 등을 파괴하였다.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만세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무력으로 만세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김동하·윤낙중 등이 체포되었다. 이에 다음 날인 4월 8일 밤 전날 체포를 피한 6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재차 면사무소를 공격하면서,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후 진압을 위해 출동한 일제 경찰에 맞서 곤봉을 들고 대항하다가 붙잡혔다. 일제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인정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여 그해 8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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