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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식

尹元植

1884. 4. 28 ~ 1945.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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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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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公州)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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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6)

관련 사건

  • · 1919년 4월 공주군 정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6) 1884년 4월 28일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정안면(正安面) 운궁리(雲弓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4월 1일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에서 전개되었던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공주군에서는 3월 7일부터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후 3월 14일 신상면(新上面) 유구리시장(維鳩里市場)·3월 17일 공주면(公州面) 공주시장(公州市場)에서 만세운동이 있었고, 4월 1일부터 5일까지 군내 각지에서 만세시위와 횃불만세시위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정안면에서는 4월 1일 석송리(石松里)의 유림인 이기한(李綺漢)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기한은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고 이병억(李秉億)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기한은 4월 1일 석송리 마을 주민들을 집합시켜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호소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큰 소리로 “모두 나를 따르라”며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나서 면소재인 광정리(廣亭里)로 향하였다. 이동안(李東案)·정재철(鄭在喆)·문백룡(文百龍)·김정쇠(金正釗)·최병한(崔炳翰) 등 20~30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뒤따랐다. 뒤이어 조정관(趙正觀)도 태극기를 들고 광정리를 향해 출발하였다. 이날 다른 운궁리 주민 20명과 함께 식수(植樹) 부역을 나와 있었다.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12시경 시위대와 내송리에서 만나 ‘독립만세’를 부르자는 권유를 받았다. 최범성(崔範聲)·이월성(李月星)·원강희(元江熙) 등과 운궁리 주민들과 함께 작업 도구인 쇠스랑·곡괭이·삽·지게 등을 가지고 만세시위대에 합류하여 광정리로 갔다. 광정리에 이르렀을 때 시위 군중은 500여 명으로 늘었다. 정안경찰관주재소에 도착한 군중 가운데 3~4명이 작업 도구를 이용하여 주재소를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기한이 “주재소를 파괴하자”고 소리치면서 머뭇거리는 군중에게 “왜 구경만 하느냐? 빨리 부수라”고 독려하며 태극기 깃대로 주재소 문등(門燈)을 깨트렸다. 이때 일제경찰관 주재소 건물·게시판·유리창·창틀·담장 등 각종 시설물을 파괴하는 활동을 주도하였다. 주재소를 파괴한 후 일부 군중은 석송리로 돌아와 주막 김원일(金元日) 집에서 휴식을 하고 있었다. 오후 3시경 주재소 파괴를 통보받은 공주경찰서는 오후 4시 자동차로 순사 2명·순사보 1명·헌병 군조와 병사 5명을 급파시켰다. 오후 4시 40분경 일제 군경을 태운 차량이 석송리 주막에 이르렀을 때 휴식하던 14~15명이 도로로 뛰쳐나와 자동차를 막고 손을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 소리를 들은 주위 주민들이 모여 40~50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자동차로 접근했다. 하차한 목원(木原) 순사가 이동안을 주도자로 지목하고 왼손을 결박하고 오른손마저 잡으며 체포하려 하였다. 문백룡·정재철 등이 “그가 무슨 죄가 있어 잡아 가려는가”라며 소리치고 사방에서 순사를 에워싸며 떠밀었다. 이들은 순사 팔을 잡고 이동안을 끌어냈고, 순사 어깨를 밀쳐 포박을 제지하여 이동안을 구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군경들은 대오에서 흩어져 각기 여러 군중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시위대를 체포하려는 군경들을 제지하고, 순사들에게 덤벼들었다. 한국인 순사보에게는 “너는 이근남이 아니냐? 너도 조선사람인데 어째서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느냐?”며 주먹으로 구타하였다. 중성(中聖) 헌병군조는 자신의 칼을 탈취하려는 군중과 실랑이를 벌리다가 칼을 땅에 떨어뜨렸다. 상황이 긴박하다고 인식한 중성 군조는 총을 뽑아 발포하자, 군경들도 총을 난사하였다. 현장에서 이상림(李相霖)이 사망하였고 10여 명이 중경상을 당하면서 시위대는 주위로 흩어졌다. 이 상황 중에 횡산(橫山) 순사는 이동안과 정재철 등을 체포하여 공주로 철수하였다. 이후 밤에 수백 명의 군중은 다시 광정리주재소로 가서 밤까지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횃불만세운동은 4월 3일까지 광정리를 중심으로 부근 산과 들판에서 전개되었다. 이후 공주경찰서와 정안경찰관주재소 일제 경찰들이 면내 각 마을을 다니며 탐문 조사를 실시하는 등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감행하여 수십 명을 체포할 때 함께 붙잡혔다. 1919년 9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1년 2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결과, 그해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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