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淵瑚
淵瑚1919. 9. 23 ~ 1999.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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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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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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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19년 9월 23일 강원도 춘천군(春川郡) 춘천면(春川面) 소양로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안악면(安岳面) 서산리(瑞山里)이다. 호는 수암(壽岩)이다. 1938년 상록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춘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4월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학년 재학 때부터 당시 5학년 선배인 이홍채(李鴻采)·신영철(申瑛澈) 등으로부터 민족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그 후 「조선의 현재와 장래」 등 민족주의 성향의 문헌들을 읽으며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켜 나갔다. 4학년 재학 당시인 1937년 7월 24일 저녁 춘천읍 신호필(申好必)의 집에서 박태주·최상기·이영우(李靈雨)·이창우(李昌雨)·이철균(李澈均) 등과 함께 연설을 들으며 민족주의 사상을 더욱 공고히 해갔다. 연설의 취지는 최근 농촌의 피폐가 심하며 일제가 시국을 빙자하여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고 저금을 강제하여 농민의 불평이 극에 달하고 있는데, 이러한 농민을 구제하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임무라는 것이었다. 1937년 9월경 배근석(裵根錫)의 권유를 받고 상록회(常綠會)에 입회한 뒤, 동급생 최기수(崔基洙)·김연환(金鍊煥)·정인옥(鄭仁鈺)·박일환(朴逸煥) 등을 상록회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같은 해 10월 3일 춘천읍 대성정 1정목에 위치한 춘천공립여학교 뒷산에서 남궁태(南宮珆)·이찬우(李燦雨)·용환각(龍煥珏) 등이 개최한 제5회 월례회에 동기생 이풍섭·김연환·정인옥·박일환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때 선배 남궁태가 「눈물」이란 제목으로 “조선의 현 상황은 일본의 압제 하에 자멸에 빠져 있다. 이러한 압제자와 항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로 연설하였고, 용환각은 「죽음」이란 제목으로 “회원은 죽어서 후세에 그 이름이 남도록 조선독립운동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연설하였다. 이 연설을 듣고 함께 참석한 동기들과 독립정신을 고양하였다. 그 뒤 졸업을 앞둔 선배들로부터 1938년 3월 1일 남궁태의 집에서 전홍기·신기철·이풍섭·이병주·최상기 등과 모여 상록회 인계회 모임을 가졌다. 졸업생인 남궁태는 과거 1년간 상록회 간부로서의 소감을 말하고 상록수의 정신에 따라 목적 달성에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 자리에서 상록회 차기 회장에 선정되어 선배들로부터 서적 십 수권을 물려받았다. 또한 특별히 회원들의 연락 방법과 회칙 등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절대 작성하지 말라는 지시도 받았다. 이때 부회장 최기수, 서적계 신기철, 회계 박일환 등이 임원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후 최기수와 박일환이 상록회를 탈퇴하자 부회장제를 폐지하고 박태주로 하여금 회계를 맡도록 하였다. 또한 회비를 월 30전으로 결정하는 한편, 회원 확보에 적극 나서며 동급생 김정철(金鼎澈)·이철균과 후배인 3학년생 전인목(全寅穆) 등을 상록회에 가입시켰다. 1938년 6월 회원들과 함께 모여 일본 수학여행 감상 담화회를 개최하여 민족의식을 앙양하였고, 이어 한글 폐지에 대한 담화회도 열어 반드시 한글을 상용해야 하다는 취지로 연설을 하였다. 그 해 10월 박태주가 탈회하자 역원을 변경하여 회장 겸 서적계 담당자로 신기철을 정하고 회계는 이철균으로 하여금 맡도록 하였다.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후배들의 상록회 가입을 늘려 나갔다. 이와 더불어 회원들을 모아 놓고 세계의 정세, 한국의 현상, 관계(官界) 및 교육계에서의 한국인과 일본인 간의 차별 대우, 농촌 문제에 대한 당국의 시정 등에 대한 논단을 통해 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하지만 1938년 가을 상록회의 조직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회원들과 함께 붙잡혀 1년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에는 졸업도 못한 채 교화시설 대화숙(大和塾)에 머물며 나가사키 유조(長崎祐三) 검사장의 아들 가정교사를 하면서 배재고등학교에 편입하였다. 1944년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고, 광복 후 감리교신학교가 폐쇄되자 조선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아현동 호반재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 뒤 일생을 목회자로 살면서 1961년 대한민국 국전에 입선할 정도의 미술 실력으로 1963년부터 서울장로회신학교에서 기독교미술을 강의하였다. 1966년에는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으로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이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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