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암
尹壽巖1906. 12. 14 ~ 1995. 4. 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재일본조선노동총연맹(대판)
- · 고려공산청년회(대판)
- · 일본적색구원회(동경)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6) 1906년 12월 14일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중남면(中南面) 교동리(校洞里)에서 윤진선(尹珍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이명은 윤동명(尹東鳴)·(尹東明)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에서 청년운동에 종사하였다. 언양체육구락부(彦陽體育俱樂部)·언양소년소녀연맹(彦陽小年小女聯盟) 조직과 활동에 관여하였으며, 울산청년연맹(蔚山靑年聯盟)과 경남사회운동자 간친회에 참가하여 청년들의 민족의식 함양에 노력하였다. 1926년 일본 오사카(大阪) 지역으로 건너간 뒤 노동조합와 청년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27년 9월 당시 일본 최대 조선인 노동조합이었던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산하 오사카조선노동조합 결성에 참가하여 서무부장에 부임하였다. 그 다음달 오사카조선청년동맹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조선총독폭압정치반대(朝鮮總督暴壓政治反對)’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신간회(新幹會) 세력 확장에 노력하여 한국인들의 단결과 저항을 촉구하였다. 1928년 오사카조선노조 집행위원, 조선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 겸 오사카지부 정치부장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7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일본부 오사카 야체이카의 구성원이 되었다. 사실상 이 무렵 오사카지역 민족운동을 총괄하였다. 각지에 청년동맹 기관지 『조선청년(朝鮮靑年)』을 배포하고, 관동대지진 한국인 학살 추도회를 개최하는 등 대중의 민족의식과 반일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 또한 공장마다 ‘반(班)’ 조직을 건설하여 대규모 파업을 비롯한 각종 저항활동을 이끌었고, 조선공산당 공판 지원 투쟁 등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항일운동과도 깊이 연대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국치기념일 투쟁’을 수사하던 일제 경찰이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존재를 확인하고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1928년 9월경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29년 2월 3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후 극심한 고문과 열악한 옥중 환경 속에서 예심재판을 받았고, 결국 병을 얻어 1930년 8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같은 해 10월 검사로부터 징역 2년 6개월을 구형받았다. 그러자 일제의 “불법적 압박재판은 받지 않는다”고 발언하고, “조선공산당 만세” 등을 절규하는 등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보석 취소 처분을 받고 재차 구속된 후에도 “공판의 절대적 공개”, “변론의 자유”, “민족적 차별 절대 반대”, “당 및 동맹원 즉일 석방” 등을 요구하며 투쟁을 지속하였다. 1931년 3월 31일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25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이치가야형무소(市ヶ谷刑務所)에서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일본적색구원회(日本赤色救援會) 도쿄지방위원회에 합류해 동지들의 옥중투쟁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각지에서 모금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재판의 부당성을 알리는 선전물 배포했다. 회원들과 조를 구성하여 구금 중인 동료들을 면회하고, 이들이 공판정에서 논리정연하게 발언할 수 있도록 서적류를 차입해 주는 등 투쟁을 독려했다. 이 밖에 이봉창(李奉昌) 의사에 대한 사형 판결에 대한 항의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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