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龍赫
赫1886. 12. 24 ~ 194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민회
- · 대한인국민회
- · 흥사단
- · 대한국민노인동맹단
- · 구미위원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05인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6년 12월 24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수서면(水西面)에서 태어나 같은 군 읍내(邑內) 교서리(橋西里) 염수동(鹽水洞)에서 거주하였다. 이명은 이일(李逸)·이봉우(李鳳佑)이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한 후 1905년부터 2년간 창진학교(彰進學校)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08년 선천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에 입학해 1년간 다녔고, 1907년 8월 기독교 장로회에 입교하였다. 1908년에는 이기당(李基唐)의 권유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신민회 선천지회 사찰(司察)로 활동하며, 양준명(梁濬明)·선우혁(鮮于爀)과 함께 주요간부로 활동하였다. 1910년 (음)3월부터 그해 12월까지 태명중학교(泰明中學校) 사무원으로 근무했으며, 1911년 7월부터 신성소학교(信聖小學校) 교사로 근무하다가 ‘105인사건’ 피의자로 구속되었다. 1911년 10월 경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경무총감부 산하 용산 헌병경찰서에 구금되어 6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반인륜적 고문과 위협으로 일제 당국자가 날조한대로 허위진술을 하였다. 당시 ‘105인사건’은 ‘데라우치총독모살미수사건’(寺內總督謀殺未遂事件)이라 지칭하였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이들의 혐의 내용은 신민회에 가입하여 학생·청년들을 대상으로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간도지역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실추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중 합방되자, 분개하여 총독암살모의에 가담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조사받던 700여 명 가운데 123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1912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개재판이 시작되었다. 이 때 경무총감부(警務摠監部)와 검사 앞에서의 진술은 가혹한 고문에 의한 허위 진술이었다고 항의하였다. 그러나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기소자 123명 중 105인이 유죄판결을 받을 때, 이덕환(李德煥)·이춘섭(李春燮)·김동원(金東元)·양전백(梁甸伯)·신효범(申孝範)·이근택(李根宅)·오학수(吳學洙) 등 39명과 함께 징역 6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고,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주도자로 지목된 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임치정(林蚩正)·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유동열(柳東悅) 등 6인을 제외한 99명과 함께 풀려났다. 이후 105인사건 동지인 곽태종(郭泰鐘), (郭林大)과 함께 중국 안둥현(安東縣)·상하이(上海)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이일(李逸) 혹은 이봉우(李鳳佑)로 개명하였다. 1913년 11월에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였고, 1917년 7월에는 신규식(申圭植)·박용만(朴容萬)·조소앙(趙素昻)·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 14명과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취지의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18년에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부터는 김치보(金致寶)·김순약(金舜若)·이륜(李崙) 등과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 등을 목적으로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에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단장에 김치보, 총무에 김순약이 선임될 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 1931년 11월에는 흥사단 시카고지방회 주석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경로⋮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