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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完植

完植

1867. 9. 3 ~ 1943.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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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完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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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扶餘)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부여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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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유생독립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67년 9월 3일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규암면(窺岩面) 반산리(盤山里)에서 전주 이씨 17대손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화중(華仲)이다. 어린 시절부터 약 30년간 한학을 공부하며 관직에 진출하려고 하였으나,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인해 좌절되었다. 1919년 11월 경부터 국권 회복에 뜻을 두고 서울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제공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에는 전국 각지를 돌면서 군자금 2,600원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전주 출신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김진억(金鎭億)을 알게 되어 함께 독립운동을 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김진억과 함께 자신의 먼 친척인 전북 부안군(扶安郡) 부령면(扶寧面) 선은리(仙隱里)의 이승호(李承鎬)를 찾아가 군자금 10,000원을 요구하였고, 우선 600원을 받았다. 1921년 1월에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대동종약소(大同宗約所) 명의로 이승호에게 편지와 전보를 발송해 서울로 올라오라고 요구하였다. 김진억과 함께 상경한 이승호를 익선동의 조천희(趙天熙)에게 데리고 가서 독립자금을 요구하여 200원을 받았고, 며칠 뒤 다시 1,800원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5월 하순에도 서울에 온 이승호에게 다시 군자금 1,000원을 받았다. 그즈음 상하이(上海)의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과 관계를 맺고 있던 일명 유생독립단(儒生獨立團)이라는 단체에 관여하였다. 유생독립단의 단장은 오학근(吳學根)이었다. 김진억은 유생독립단에 가입하여 이태훈(李泰勳)·이성하(李聖河)·이승필(李承弼)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모집한 군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요원 임경호(林敬鎬)·최석천(崔錫天)에게 전달하려다가 1921년 7월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은 해 10월 5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공갈죄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2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5년 만기 출소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정감록(鄭鑑錄)』의 비결(秘訣) 가운데 ‘왜망어호 호망어선(倭亡於胡) (胡亡於鮮)’이라는 문구를 “일본은 중국에 패하고 중국은 조선에 망함으로써 결국 조선이 독립하여 동양을 지배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각지를 돌면서 장차 독립의 시기가 올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과거 동지였던 전향자의 밀고로 1939년 9월경 충남 부여에서 정읍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다시 붙잡혔다. 같은 해 12월 21일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이른바 육군형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6월을 받았다. 군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으로 인한 정신착란증으로 가출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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