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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겸호

李謙浩

1898. 6. 21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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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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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평양(平壤府)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평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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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8)

관련 사건

  • · 1919년 평양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8) 1898년 6월 21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경창리(景昌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 학생으로, 3월 1일 평양부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평양의 만세시위 계획에는 학생들도 동참하였다. 이보식(李普植)·박형룡(朴亨龍)을 비롯해서 광성고보 학생들과 숭의여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안정석(安貞錫)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평양의 각급 학교 학생들도 만세시위 계획에 동참하였다. 숭실학교·숭실중학·광성고보·평양고보·숭의여학교·숭덕학교·숭현학교 등의 학생 대표들은 회합을 갖고, 지역을 분담해 만세시위 참여자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기로 하였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기독교인와 천도교인 등이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1시경 장로교는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의 앞마당인 숭덕학교(崇德學校) 교정에서, 감리교는 광성학교(光成學校) 근처의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에서 기독교인과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고종 봉도식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오후 2시경 독립선언식으로 전환해 ‘독립만세’을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천도교측에서는 설암리(薛岩里)의 천도교구당에서 집회를 갖고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일제 경찰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평양시내로 진출하였다. 숭실학교 학생으로서 3월 1일 숭덕학교 교정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시위대 일원으로 평양 시내 일대를 행진하였다. 일제 군경이 소방대까지 동원하고 위협 사격을 가하면서 강경하게 진압하자, 시위대와 함께 일시 해산하였다. 하지만 저녁에 다시 학생들과 숭실학교에 집결해 애국가를 부르면서 행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일제 군경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 군경의 대규모 검거 과정에서 400여 명의 인사들이 체포되었지만, 다른 학생들과 함께 모우리(牟義利, Eli Miller Mowry)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 집으로 피신하여 검거를 피하였다. 이후 여러 외국인 선교사 집에서 은신하고 있던 학생들과 함께 경고문 등을 제작해 출판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3월 15일경 숭실학교 학생 이보식(李輔植)·김태술(金泰述)·이인선(李仁善)·이양식(李養植) 등과 함께 등사판 『독립신문』을 비롯해서 경고문 등을 제작하였다. 그러다가 4월 4일 오후 3시경 일본 검경의 가택수색으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모페트(Samuel Austin Moffet)의 집에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8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본인은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조선국혼을 망각할 수 없는 마음에서 독립을 희망하였으며,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이 제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세시위에 참여한 행위는 조선 민족의 정당한 해우이이기에 죄가 되지 않는다”면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1923년 3월 14일 김만필·김무생·김병익·김승섭·김익수·김인빈·전성원·이창훈·임기주·전창근 등과 함께 숭실학교를 제14회로 졸업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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