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承宰
承宰1873. 6. 16 ~ 1910. 2. 2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강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전기의병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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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73년 (음)6월 16일 경상북도 문경군(聞慶郡) 가은면(加恩面) 완장리(完章里)에서 아버지 이강년(李康秊)과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좌경(佐敬)이며, 호는 창주(蒼洲)이다. 1896년과 1907년 부친 이강년이 거의하자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에 항거하는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896년 (음)1월 11일 가은면 도태(道胎)장터에서 이강년이 의병을 일으키자, 문경 농암(籠巖) 출신의 서상업(徐相業) 등과 함께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2월 이강년과 함께 충북 제천(堤川)에서 류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거의한 호좌의진(湖左義陣)에 합류하였고, 이후 의병부대가 해산되자 부친을 따라 청풍(淸風) 금채동(金采洞)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이후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항거하는 의병이 다시 전국에서 일어났다. 1907년 3월 충북 제천에서 이강년이 다시 거의하자, 서상업·한양이(韓良履) 등과 함께 의병부대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1907년 9월 7일 문경을 장악한 뒤 조령(鳥嶺)전투, 갈평(葛坪)전투, 적성(赤城)전투 등에서 일본군에 맞서 항전하였다. 1907년 10월 청풍(淸風) 출신의 전 정언(正言) 김상한(金商翰)이 병력을 모아 찾아오자, 이강년에게 그를 별진장(別陣將)으로 임명하도록 상고(上告)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단양군 가곡면(佳谷面) 피화리(避禍里)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부상당한 이도악(李道岳)을 데리고 적의 포위망을 벗어나기도 하였다. 한편, 이강년 의병부대는 1908년 5월 경북 봉화(奉化) 서벽(西碧)전투, 내성(乃城)전투, 재산(才山)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일 청풍(淸風) 작성(鵲城)전투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부친 이강년이 총상을 입고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자 동생들과 함께 상경하였다. 그리고 부친이 갇힌 옥문을 부수며 저항하다가 붙잡혀 구금당하였다가 이튿날 풀려났다. 그해 10월 13일 이강년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하자, 의병장 김상태(金尙台)·한양이 등과 흩어진 동지를 모아 활동을 이어갔다. 얼마 후 김상태도 잡혀 사망하자 의제(義弟) 한양이와 함께 전국을 돌며 결사대를 조직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일로 다시 붙잡혀 투옥되었다가, 옥중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후 1년 이상 피신하였지만, 결국 병을 얻어 1910년 2월 26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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