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壽岳
壽岳1845 ~ 1927. 9. 2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영해의진
- · 김하락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3)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출신으로, 아버지 이담영(李聃榮)과 어머니 고성 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료에 따르면, 1845년생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재령(載寧)이고, 17세기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8세손이다. 자는 치숭(致崇)이고, 호는 우헌(于軒)이다. 어려서부터 집안과 대은(大隱) 이수영(李秀瑩)의 가르침을 받아 경학에 밝았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영해(寧海)와 영덕(盈德)에서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였다. 1896년 (음)1월 22일 유림사회의 자치적 성격의 조직인 집강소(執綱所)를 먼저 설치하고, 최고 대표인 도집강(都執綱)을 맡았다. 이어서 부집강(副執綱)·찬획(贊劃), 그리고 훈정(訓正)·도통(都統)·도서기(都書記)·서기(書記) 등 여러 부서를 설치하고, 무려 167명을 배정하였다. 이때 집강소의 최고 지도급인 도집강, 부집강, 찬획 등 주요 임무를 맡은 인물은 당시 영해지방을 이끌어 가는 가문 출신들이었다. 20여 일이 지난 후 도집강으로서 주변 지역의 의병부대 결성에 영향을 받아 영덕군 창수면(蒼水面) 인량리(仁良里)에서 본격적으로 영해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음)2월 11일 집강소 조직을 의병부대로 전환하고, 총 212명을 대장 아래 부장(副將)·군문도총(軍門都摠)·분의장(奮義將)·찬획(贊劃)·참모(參謀)·군정(軍正) 등 여러 부서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지도층 인사들은 주로 창수면·병곡면(柄谷面)·축산면(丑山面)·영해면(寧海面) 일대의 유생들이었고, 재령 이씨, 영양 남씨(英陽南氏), 무안 박씨(務安朴氏), 안동 권씨(安東權氏), 대흥 백씨(大興白氏) 등이 중심이었다. 이후 1896년 3월 초순부터 영덕에서 원병을 요청하는 급보를 받고 일부 병력을 파견해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병사 50~60명을 파견하여 보기암(洑基岩) 언덕에 진을 치게 했다가 일본군의 급습에 맞서 격전을 치렀다. 마침 영덕의병부대가 전투에 합세함으로써 일본군을 물리치고 승리하였지만, 10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도 발생하였다. 7월 5일에는 김하락(金河洛) 의병부대가 영덕을 거쳐 영해로 이동하면서 소모장(召募將) 이채구(李采久) 등을 보내 상황을 알려왔고, 7월 7일 선봉장(先鋒將)과 좌익장(左翼將)을 보내 영해 축산(丑山)에 머물고 있는 김하락 의병부대의 본진을 방문하도록 하였다. 7월 11일에는 영해로 들어온 김하락 의병부대와 영해의병부대가 합세를 요구하였다. 이때 갑자기 관군 300명이 영덕을 향하고 있다는 전달을 받고 김하락 의병부대는 영덕으로 나아가 관군을 맞아 영덕전투를 펼쳤다. 이로 말미암아 두 의병부대 사이의 통합 논의는 무산되었다. 8월 14일에는 병곡(柄谷) 사천평(沙川坪)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적의 습격을 받고 크게 패하고, 이후 조정의 명을 받아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이후 1800년대 말에 지어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梧村里) 저곡마을에 위치한 우헌정(于軒亭)에서 말년을 보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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