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光三
光三미상 ~ ?
관련 단체
- · 이석용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1)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1) 자료의 한계로 출신지, 출생시기는 확인할 수 없다. 전라북도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임실(任實) 지역의 농촌 유생 출신 이석용(李錫庸 일명 李學士) 의병부대에서 참모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석용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과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은 인물로, 연재로부터 정재(靜齋)라는 호를 부여받았다. 이석용은 고종의 강제 퇴위를 막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자 1907년 8월 29일부터 총포와 철환을 수집하고 사방에 격문을 전하여 의병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음)9월 12일 마이산 용암(龍巖)에 제단을 만들고 하느님께 제사를 올린 이석용은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표방하며 전해산(全海山)과 같이 군사를 일으켰다. 이석용 부대는 의병부대 약속 14개 조항과 의령(義令) 10조를 제시하여 의병 규율을 엄격히 하였다. 일본군을 적대시하되 청과 서양인에게는 무고한 원수를 사지 말도록 행동할 것과 이욕(利慾)을 자제할 것, 군량·군자금 모집과정에서 무리하여 인심을 잃지 않을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이석용 의병부대에서 참모(參謀)의 직을 맡아서 활동하였다. 이석용 의병부대는 1907년 9월 13일 진안군(鎭安郡) 진안읍(鎭安邑)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당시 기삼연(奇參衍)이 전라도 일대의 의병부대들을 결집시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자 의병부대를 이끌고 이에 합류한 뒤 1907년 10월 말부터 다음해 1월 말까지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대대적인 의병 탄압 작전으로 인해 1908년 2월 기삼연이 붙잡혀서 사망하게 되자 호남창의회맹소는 다시 여러 의병부대들로 분진하여 소규모 유격전을 펼쳤다. 이때 이석용 의병부대도 분진(分陳)하여 독자적으로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석용 의병부대는 1908년 9월 임실 전투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하면서 결국 해산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의병부대가 해산하기까지 벌어졌던 숱한 전투 와중에 전사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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