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炳麟
炳麟1886. 3. 21 ~ 1930. 4.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김포군 월곶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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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6년 3월 21일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월곶면(月串面) 취암리(醉岩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2일 월곶면 군하리에서 거행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김포군 월곶면에서는 3월 22일 이래 4월 5일까지 여러 차례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22일 김포군에서 최초로 군하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만세시위는 매우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만세시위는 군하리의 백일환(白日煥), 경성예수학교(京城耶蘇學校)의 학생이면서 통진교회(通津敎會) 전도사로 활동하던 이(李)살눔, 고정리(高亭里)의 최우석(崔禹錫), 고양리(高陽里) 성태영(成泰永) 등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성태영·백일환 등은 회합을 가지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만세운동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 자리에서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에 적극 찬성한다는 의견을 서로 확인한 이들은 월곶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논의를 통해 3월 22일 군하리 장날에 많은 주민들이 모이는 것을 기회로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계획하고,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하여 주민들에게 배포할 태극기 등을 제작하였다. 성태영·백일환 등 주도 인물들은 3월 22일 군하리 장터로 나가 주민들에게 독립의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을 원하는 자는 공자묘(孔子廟)로 모이라”고 호소하였다. 이때 장터에서 이들의 호소를 듣고 크게 공감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장터에서 만난 박용희(朴容義)와 의기투합하여 다른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적극 독려하였다. 이후 4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공자묘로 집결하였고, 성태영·백일환 등과 함께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며 만세시위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이어서 박용희와 함께 태극기를 앞세운 시위대열을 이끌며 월곶면사무소·주재소·통진공립보통학교(通津公立普通學校) 등 일제 식민통치의 주요 기관을 향해 행진하였다. 그러면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면사무소에 도착한 이후 성태영·백일환 등의 지휘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이어서 순사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 발생 소식을 접수한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가로막으며 주도자인 성태영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에 분노한 백일환이 야마다(山田重洋) 순사를 구타하기 시작하였고, 성태영의 지휘로 다른 주민들과 함께 야마다를 공격해 총과 칼을 빼앗았다. 이처럼 시위대는 평화로운 만세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려는 일제 경찰의 행동에 크게 분노하고, 주재소와 면사무소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때 백일환 등과 함께 앞장서서 주재소로 들어가 한인 순사보에게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요구하였고, 다른 주민들과 더불어 일제 경찰들을 구타하였다. 그리고 다시 면사무소로 이동하여 박용희·백일환 등과 함께 면서기 서기 조원석(趙元錫)·박용돈(朴容敦)·오기빈(吳驥彬)·임원상(林元相) 등에게 태극기를 주며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하였다. 이같이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한 이후 일제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 해 9월 20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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