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秉烈
秉1872. 1. 10 ~ 1929. 3.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임실군 둔남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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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2년 1월 10일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지사면(只沙面) 계산리(溪山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둔남면(屯南面) 오수리(獒樹里) 장터에서 펼쳐진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임실군 오수장터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서울에서 고종 장례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이기송(李起松)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대규모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결의하면서 전개되었다. 이때 이기송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약속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오후 2시 이기송은 오수장터에 모인 주민들 앞에서 독립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따라 부르며 장터에 모인 군중들을 이끌었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시위대의 규모는 시간이 지나면서 약 2,000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이기송을 열렬하게 성원하면서 만세를 외치고, 주민들을 격려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하지만 만세시위가 고조되자 오수경찰관주재소 경찰들이 출동해 주도자인 이기송을 붙잡아 구금하였다. 그러자 수백 명의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 내부로 들어가 유리창과 사무기구를 파손하고, 일제 경찰들과 맞서 싸워 이기송을 구출하였다. 이어서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다시 둔남면사무소(屯南面事務所)로 쳐들어가 면장 이창의(李昌儀)와 면서기(面書記) 임상학(林相學)에게 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며 기물을 파손하였다. 그리고 둔남면 일대 일본인 가옥과 상점에 대한 공격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러한 오수장터의 만세시위 소식을 접한 일제는 임실경찰서와 남원헌병분대의 무장한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후 오수장터에 도착한 일제 군경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때 만세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10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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