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李道在

道在

1879. 6. 1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道在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함남 이원(利原)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이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조선독립단 이원지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관련 사건

  • · 1919년 이원군 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5) 1879년 6월 1일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동면(西面) 의덕리(儀德里)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산도재(李山道在)를 썼다. 천도교 전도사로 활동하였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이원군 서면 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5일경 함경남도 이원군에 독립선언서와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3월 7일 이원군 천도교구장 김병준(金秉濬)은 동면에 위치한 천도교구실에서 박승룡(朴承龍) 등 15명과 함께 회합하고, 기도교인 박용해(朴龍海)가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공개하였다. 그리고 회합에 참여한 인사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기반으로 “우리들 조선 민족은 세계의 대세에 따라 민족 자결의 원칙에 의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2천만 동포에게 경고한다”라는 문구를 담은 선언서를 작성하고, 이를 인쇄해 읍내에 전파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8일 이원군 천도교구실에서 공시우(孔時祐) 등 15명의 이름을 기입한 선언서 500매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김병준·김선태(金璿泰)·박승룡과 함께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이원지단(利原支團)을 조직하고, 이원군에서의 만세시위를 주도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이에 3월 9일 김병준·공시우·박승룡은 서면을 비롯해서 인근 마을로 사람들을 파견해, 3월 10일 장이 서는 이원군 서면 남문리(南門里)의 시장으로 집결하도록 독려하였다. 3월 10일 오전 11시 30분 무렵, 박승룡을 비롯해서 만세를 준비한 인사들과 함께 읍내 장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그리고 ‘조선민족독립단’이라고 쓴 대형 깃발을 박승룡과 함께 흔들며 천도교 신자들을 비롯한 8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 행진을 주도하였다. 김중삼(金仲三)·염처학(廉處學)으로부터 선언서 13매를 전달받은 최병원(崔秉元)은 군중에게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김창렬은 읍내 장터에 모인 군중을 향해서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배포된 선언서를 받은 장홍규(張弘奎)를 비롯한 군중은 시위대에 동참해 적극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박승룡·이윤갑(李允甲)·염처학·조창서(趙昌瑞)·김준태·하홍대(河洪大) 등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서면(西面)의 남문리(南門里)·서문리(西門里) 일대에 위치한 이원군청·헌병분견소·공립보통학교·이원시장 등을 행진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4월 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7년부터는 신간회 이원지회에서 활동하였고, 1929년 신간회 이원지회 임시대회에서 검사위원장(檢事委員長)에 선임되었다. 1941년에는 유사종교단체인 ‘무극대도(無極大道)’에 입교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지만, 1943년 8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