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國範
國範1869. 2. 23 ~ 1931. 10. 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관련 사건
- · 양양군 도천면
- · 강현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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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5) 1869년 2월 23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현북면(縣北面) 장리(獐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양양군 손양면(巽陽面) 부소치리(扶蘇峙里)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함평(咸平)이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형이 도천면(道川面) 중도문리(中道門里, 현 속초시 도문동)에서 쌍천서숙(雙川書塾)을 세워 후진을 양성한 설초(卨樵) 이석범(李錫範)이다. 이석범은 고종의 장례식에 참례하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양양군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이끌었는데,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형 이석범의 영향이 컸다. 1919년 4월 초 양양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5일 도천면 물치시장(沕淄市場) 만세시위에 앞장섰으며, 같은 달 6일 왕도리(旺道里), 9일 기사문리(其士門里) 만세시위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강현면(降峴面)과 도천면 주민들이 힘을 합쳐 일으킨 물치시장 만세시위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물치리 만세운동은 형 이석범, 조카 이재훈(李載勳)과 함께 추진하였다. 강현면의 장세환(張世煥)과 도천면의 김영경(金英經)이 조직적으로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장세환 등 주도자들은 4월 4일 중도문리에 사는 이종국(李鍾國)의 집에서 친목계를 계기로 만나, 4월 5일 물치시장 장날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도천면 중도문리 일대를 김영경과 같이 담당하였고, 대포리(大浦里, 현 속초시 대포동)는 박사집(朴士集)이 각각 맡아 시위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강현면에서는 장세환이 중심이 되어 김대선(金大先)·이철우(李喆雨)·추병원(秋秉元)·전달원(全達元) 등 마을 구장(區長)과 감리교회 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마을 주민들을 규합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5일, 아침 일찍 물치시장으로 향하였다. 강현면 주민들도 속속 물치시장으로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같은 시각 도천면 주민들은 대포리에 있는 경찰주재소로 집결하였다. 장터에 주민들이 모이자 구장들은 태극기를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고, 주민들을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오전 10시, 조카 이재훈이 직접 만든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쌀가게 앞에서 독립선언식을 진행하였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난 후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그리고 시위대를 이끌고 장터를 누비며 만세운동을 펼쳤다. 물치시장에서 만세운동을 마친 후 시위대와 함께 약속대로 도천면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펼치고 있는 대포리로 향하였다. 강현면과 도천면 주민들, 시위에 참여한 주민들까지 모두 1,000여 명의 군중이 대포리 경찰주재소 앞을 가득 메웠다. 시위대와 함께 일제 경찰을 향하여 “너희 나라로 가라”고 외쳤고, 군중의 숫자에 눌린 일본 경찰은 절을 하며 연신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과의 무력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재훈이 “내일은 양양면에서 다시 모이자”고 하자 시위대는 다음날을 기약하며 모두 흩어졌다. 약속한 대로 4월 6일에도 강현면과 도천면 주민들은 다시 모여 양양읍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튿날은 살고 있던 손양면에서도 만세시위가 벌어졌는데, 배후에서 지원하였다. 상왕도리(上旺道里) 김종택(金鍾澤), 주리(舟里) 최한두(崔漢斗), 우암리(牛岩里) 김진열(金振烈) 등 마을 구장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펼쳤다. 구장들은 주민들을 이끌고 큰 태극기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깃발, 징과 꽹과리 등을 울리며 양양면으로 향하였다. 경찰들의 저지에 군중은 흩어져 양양면으로 들어가서 강현면·도천면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9일에 펼쳐진 기사문리 만세운동은 유학자와 기독교인, 마을 구장이 힘을 합쳐 계획하였다. 일명 ‘기사문운동’으로 불리는 이 만세운동은 현북면(縣北面) 원일전리(元日田里)의 유학자 박규병(朴奎秉)·박원병(朴元秉) 형제, 상광정리(上光丁里)의 감리교 교인 오세옥(吳世玉)·이응렬(李應烈) 등이 힘을 모아 추진하였고, 현북면 구장들이 주민 동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때 도리(陶里) 구장 김재한(金在漢)의 집에 가서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며, 양양군에서도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였으니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민들을 동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기사문 만세시위가 대규모 시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에 힘을 보탰다. 일제 경찰은 만세운동 이후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 작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6월 18일 1심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같은 해 7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일부 취소로 징역 1년을 받고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면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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