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선
尹永善1895. 3. 16 ~ 1967. 2.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장안면 및 우정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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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5년 3월 16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장안면(長安面) 석포리(石浦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3일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우정면(雨汀面)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장안면·우정면 만세시위는 장날에 일어난 다른 지역의 만세시위와는 달리, 조직적인 주민 동원을 통해 일제 관공서인 면사무소와 경찰 주재소를 파괴하고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는 적극적이면서도 공세적인 만세시위였다. 주민 동원에는 마을 구장이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27일 구장 회의에서 만세시위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이곳에 참여한 석포리 구장 차병한(車炳漢)은 수촌리(水村里)의 백낙열(白樂烈), 어은리(漁隱里)의 이시우(李時雨), 장안리(長安里)의 김준식(金俊植) 등과 함께 구장 회의를 주도하면서 마을 주민을 동원할 것과 행동대를 내세워 시위를 이끌고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각 마을의 사환을 통해 주민에게 전달되었다. 4월 3일 아침 사환 엄성구(嚴聖九)의 연락을 받고 첫 집결지인 석포리에 모였다. 주도자들은 석포리 뒷산에 걸어둔 북을 두드리며 주민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곧이어 우정면 주곡리(珠谷里) 주민들도 이치덕(李致德)·장순명(張順明)·차봉습(車鳳習)·장봉래(張鳳來)의 인도하에 석포리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사전에 전달받은 바와 같이, 주재소 공격을 위해 몽둥이를 지참하였다. 장안면사무소에 도달한 두 마을의 시위대는 약 200명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1차 목표인 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는 한편, 인근에 있는 쌍봉산(雙峯山)에 올라갔다. 쌍봉산은 우정면에 있는 해발 117.4m의 낮은 산이지만, 두 개 면이 발아래에 펼쳐지는 중심부였다. 이곳에는 수촌리·석포리·주곡리·어은리 주민들이 모였고, 인원은 400여 명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이곳에서 ‘독립만세’를 연호하였고, 이어서 우정면사무소로 출발하였다. 시위대는 1,500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들이 화산리(花山里)에 있는 우정면사무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경이었다. 면장과 면직원은 이미 도주하였고, 시위대는 몽둥이로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군중은 약 2,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앞세우며 3~4㎞ 정도 이동하여 화수리(花樹里)에 있는 화수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주재소 앞에서는 원형으로 진을 치고 3패로 나누어 일제히 돌을 던지며 돌진하였다. 그리고 총을 쏘며 저항하는 일제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를 몽둥이와 돌로 처단하였고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힌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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