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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삼

尹榮三

1891. 4. 21 ~ 1919.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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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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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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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원곡면과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1년 4월 21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외가천리(外加川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원곡면·양성면(陽城面)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원곡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28일 내가천리(內加川里) 이시련(李時連)의 집에서 계획되었다. 지역 유지들은 이곳에서 인근 마을 주민을 규합하여 외가천리에 있는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만세시위는 3월 29일부터 31일까지 진행되었고, 시위가 종료되자 칠곡리에 거주하는 이유석(李裕奭)과 홍창섭(洪昌燮)이 “내일도 모이라”고 권유하여 다음 날인 4월 1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외가천리에서는 이덕순(李德順)이 주도하여 “오늘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니 저녁 식사 후 모이라”라는 내용이 전달되었다. 저녁 8시경 각 동리 주민들은 한 손에 등불과 횃불을 들고 원곡면사무소 앞에 모여들었고, 군중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원곡면장인 남길우(南吉祐)를 끌어내 태극기를 쥐여 주며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경찰주재소와 우편소 등의 관공서가 있는 양성면으로 이동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성은 고개를 넘은 시위대는 양성면의 시위 군중과 만나게 되었다. 양성면의 주민들은 오후 9시 반경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양성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자진 해산하여 귀가하던 길이었다. 2,000명으로 확대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진격한 뒤,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돌을 던지고 건물을 방화하였다. 주재소를 불태운 뒤에는 “전선을 끊으러 간다”라며 몰려갔고, 전신과 전화 통신을 겸용하던 전신주 3개를 도끼로 찍어 넘어뜨렸다. 전선도 몇 토막으로 절단되었다. 일부는 양성우편소로 이동하여 사무실에 걸린 일장기를 떼어내 불태웠으며, 일본인 민간인을 쫓아내고 가옥을 파괴하였다. 양성면사무소에서도 서류를 꺼내 소각하였다. 4월 2일 새벽, 시위를 종료하고 성은 고개를 통해 원곡면 외가천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원곡면사무소 면장을 포박하고 사무실의 집기와 서류를 불태웠다. 아침 식사 후에는 평택의 경부선 철도 침목 핀을 뽑으려 하였으며 원곡리 남산에 돌망태를 쌓아 올려 일본수비대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하지만 시위대는 일본수비대의 진입과 동시에 피신하였다. 일제 헌병대는 숨어있던 주민을 검거하기 위해 기만적인 회유책을 썼다. 농사철을 고려하여 경찰서장의 연설을 들으면 사면해 농사짓게 해주겠다고 속인 것이다. 주민들은 서로 권유하여 4월 19일 현재의 원곡초등학교 뒷산에 모였고, 헌병대는 이들을 포위하여 총칼로 위협해 폭행을 가하였다. 그리고 저항하는 주민은 참살하였고, 상투를 묶어 안성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에 붙잡혀 안성경찰서로 이송되었다. 1919년 4월 27일 일제 경찰의 혹독한 고문 끝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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