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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원

尹錫元

1861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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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윤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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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대동(大同)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대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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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금제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이천리(梨川里) 출신이다. 1919년 당시 59세이므로 1861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院場里) 일대에서 시작하여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반석면(班石面) 상사리(上四里) 모락장(沙川市場, 사천시장) 일대로 번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는 행정 구역은 다르지만 인접한 지역이었다.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만세시위는 반석면 반석교회(盤石敎會) 장로 조진탁(曺振鐸)이 3월 1일 평양에 방문하였다가 만세시위를 목격한 뒤 돌아와 이웃의 예수교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조진탁은 원장교회(院場敎會)의 지도자 윤상열(尹相悅)과 차현구(車玄九)에게 연락해 함께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두 마을의 연합 시위를 장날을 기하여 개최하기로 준비하였다. 3월 4일 오전 10시 경, 원장리의 합성학교(合成學校) 운동장에서 원장교회의 교인들이 모여 독립선포식을 개최하였다. 장로 차병규(車炳奎)·지석용(池錫湧)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합성학교 교감 임이걸(林利杰)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였다. 독립선포식이 마무리된 후, 군중은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장이 서고 있었던 원장시장(院場市場)으로 향하였다. 그러던 중 사천시장의 시위를 계획하였던 사천교회(沙川敎會) 목사 송현근(宋賢根) 등 지도자들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3월 2일부터 사천헌병대(沙川憲兵隊) 유치장에 갇혀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시위대는 헌병대에 갇힌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3월 4일 오후 1시경부터 원장에서 사천시장으로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사천시장으로 향하는 행렬 속에 참여하여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사천시장 입구에 이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장남 윤창도(尹昌道)는 다리에 총상을 입었으며, 차남 윤관도(尹寬道)는 허리에 총상을 입었다. 이를 목격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사천 제생의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은 뒤, 평양 기홀병원으로 이동하여 치료를 받게 하였으나 결국 두 아들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이날 헌병대의 무자비한 발포를 목격한 군중들은 격분하여 돌을 던지며 저항하였다. 이에 헌병주재소장 사토(佐藤) 상등병은 총을 쏘며 도주하였다. 군중들은 헌병대 청사에 숨어든 사토를 처단하기 위해 건물에 불을 질렀고, 불을 피해 달아나는 사토를 쫓아가 처단하였다. 헌병보조원 2명 역시 달아나다 군중들에게 붙잡혀 몰매를 맞고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13명이 사망하였다. 일제의 무자비한 시위 참여자 검거 소식에 은신하였으나, 일제 헌병대를 공격한 일로 평양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받았다. 이 소식을 듣고 용강경찰서에 출두하여 자수하였으며, 1921년 12월 28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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