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承七
承七1850. 4. 8 ~ 1912.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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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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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50년 (음)4월 8일 충청북도 보은군(報恩郡) 내북면(內北面)에서 경주 감영장(慶州 監營將) 이지현(李之鉉)의 슬하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덕양군(德陽君) 이기(李岐)의 12세 손이다. 자는 두경(斗卿)이다. 부친이 서울에서 보은군 천곡리(報恩郡 泉谷里, 현 보은군 내북면 창리로 추정)로 이주해 거주하였다. 1867년 무과에 급제한 후 1870년 관서의 문서를 주관하던 주부(主簿)를 시작으로 찰방(察訪)과 감찰(監察)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880년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경기 도원 도찰방(京畿 桃源 道察訪), 1882년 경상 송라 도찰방(慶尙 松羅 道察訪)을 거쳐, 1886년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에 임명되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죽음으로 충절을 지키고자 다량의 아편을 먹었으나, 가족에게 발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2년 (음)6월 일왕(日王)이 죽자, 보은군 내북면의 창리(倉里) 분파소(分派所) 소장이 주민 수백여 명을 모아놓고 상복을 입으라고 강요하였다. 이에 맞서 “우리나라의 태황 부자가 살아계신데 어찌 일본 왕의 상복을 입겠는가, 나는 죽더라도 상복을 입지 않을 것이다. 이를 통감부에 고발하여 나를 속히 죽여라”고 하면서 거부하였다. 일제 관헌이 다음날 다시 상복을 입을 것을 종용하였으나, “우리 집안은 왕실의 가문으로 다른 사람과 다른데 어찌 원수의 상복을 입어 치욕을 받겠는가, 차라리 죽어 욕을 면하겠다”고 항거하였다. 그러다가 1912년 (음)6월 26일 아침 가족들에게 인근 청주(淸州)에 볼 일이 있다는 핑계로 의관을 정제하고 집을 나서 인근 봉황대(鳳凰臺) 정상에 올라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집안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고, 백성에 두 임금이 없다. 내 몸에 원수의 상복을 입는 것은 만대의 수치이니, 차라리 머리가 떨어져 나가 죽을지언정 오랑캐가 되지 않으리라(天無二日民無二王, 身被讐服萬代羞恥, 寧爲殞首不作夷狄)”고 쓰여 있었다. 1959년 3월 1일 지역 주민들이 순절 현장 인근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1991년에는 내북면 주민들이 주관하여 봉황리에 ‘이지사승칠공 항왜의결기념비(李志士承七公) (抗倭義訣記念碑)’를 다시 세웠고, 2015년 노후된 비를 재차 건립하여 의로운 정신과 행동을 기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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