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可順
可順1867. 11. 15 ~ 1943. 4. 1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원산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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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67년 11월 15일 함경남도 원산부(元山府) 석우동(石隅洞)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으로 약종상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1919년 3월 1일 원산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2월말부터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 선언을 준비하던 원산 상리교회(上里敎會) 담임목사 정춘수(鄭春洙)로부터 서울에서의 독립선언서 선언과 만세시위 준비 소식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정춘수가 원산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자는 제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면서 원산에서의 만세시위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2월 28일 진성여학교에서 개신교의 장로파·감리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모임을 열었다. 이가순은 차광은(車廣恩)·함하은(咸河殷)·정연수(鄭延壽)·인이극(印利極)·김장석(金章錫)·차용운(車用運)·김기헌(金基憲)·이진구(李鎭九) 등에게 경성에서 독립선언서 선언과 만세시위를 추진한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독립을 위해서 원산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자고 제안하였고, 참여하겠다는 결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차광은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2,000장을 인쇄하였다. 한편 서울에서도 원산으로 박희도(朴熙道)·오화영(吳華英)을 통해 독립선언서 300매를 받은 곽명리(郭明里)가 2월 28일 밤 정춘수에게 이를 전달하였다. 다시 선언서 300매를 정춘수로부터 교부받아 3월 1일 50매를 원산 내 각 관청으로 보내고, 광성학교 학생들에게도 배포하였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 이순영과 함께 원산리 시장에 모인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차용운·차광은·김기헌·함하은·정연수·인이극·이진구·김장석과 함께 3,0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원산 일대를 행진하였다. 오후 4시에는 500여 명의 시위대가 별도로 일본인이 거주하는 시가지 일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그러자 일제 당국은 원산 헌병대, 원산경찰서와 파출소 3개소, 소방부, 재향군회원 등을 총동원하여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일제 군경은 현장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사 30여 명과 이후 대대적인 검거과정을 통해 9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4월 9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일부 취소되었지만 다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만세시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근거하고 세계 대세에 따라서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한 의사 행위로서 죄가 아니며, 인류 공존에 의한 필연적 요구이자 인류 양심의 자연적 발로이기에 추호로 안녕질서를 문란시키는 일이 없었으며, 또한 파괴를 자행한 적이 없이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시 상고하였으나,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이후, 1927년 7월 11일 신간회 원산지회 설립대회에서 개회사를 하였고, 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2월에는 신간회 원산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원산총파업과 관련하여 사회단체 대표라는 이유로 가택수색을 당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안변폭탄사건’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부회장 김우상(金羽相)과 함께 안변경찰서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함흥검사국까지 넘어갔지만, 7월 4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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