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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吉

承吉

1887. 7. 13 ~ 1965.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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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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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황주(黃州)계몽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황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상동교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안명근 사건(안악사건)
  • · 105인 사건
  • · 정방산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77) 1887년 7월 13일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서성면(西城面)에서 태어났다. 1894년부터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896년 리(G. Lee, 李吉咸)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1년 헌트(W. Hunt)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황주소학교(黃州小學校)를 거쳐 1905년 숭실학교(崇實學校)를 졸업하였다. 이후 사리원(沙理院) 광성교회(光成敎會) 부속 광성소학교(光成小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육계몽운동에 나섰다. 1907년 이후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 전덕기(全德基) 목사 중심의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에 출입하면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고 구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1908년 최광옥(崔光玉), 김구(金九), 도인권(都寅權), 김홍량(金鴻亮) 등과 함께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결성하고,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11월 황해도 지역 민족운동가 160여 명 중 한사람으로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 일명 ‘안악사건(安岳事件)’ 피의자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일제 경찰에게 잔인한 고문을 받으며 강요받아 결국 허위 자백을 하게 되었고, 이 허위 진술은 유일한 근거가 되어 사건을 왜곡·과장시키는데 악용되었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되어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 강도미수 혐의로 김구·김홍량·원행섭(元行燮) 등 7인과 함께 징역 1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4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7년으로 감형되어 1917년에 풀려났다. 이에 앞서 1911년 가을에는 서북지방의 반일기독교세력이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105인사건’ 피의자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안명근사건으로 형을 받고 옥중에 있었기에 123명 기소자 명단에서는 제외되었다. 풀려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 교회활동에 진력하였다. 1921년 사리원 광성교회 장로로 장립된 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3년 졸업한 뒤 그 해 12월 목사안수를 받았다. 1926년 장로교 황해노회장(黃海老會長)으로 선임되었고, 1930년부터 10년간 장연읍교회(長淵邑敎會)에서 시무하였다. 1935년에는 평양노회장, 1936·1937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2년간 총회장 재임 중 일제 당국이 신사참배를 집요하게 강요하였으나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러나 총회장에서 물러난 1938년 5월 목사 김응순(金應珣)·장운경(張雲景) 등과 일본 시찰을 다녀온 후 1938년 27회 장로회 총회 때 신사참배 가결에 순응하였다.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이를 반대해 온 외국 선교사들은 평양신학교와 숭실학교 등을 자진 폐교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자 변린서(邊麟瑞)·장운경·조택수(趙澤洙) 등과 함께 숭실학교학부형회(崇實學校學父兄會)를 발기하여 신사참배 결정에 반대하는 외국인 선교사들과 분리하여, 평양신학교와 숭실학교 폐교를 막기 위한 ‘후계경영촉성회’(後繼經營促成會)를 결성하는 등 학교복구운동에 나섰다. 1940년부터 황해도 겸이포(兼二浦) 중앙교회(中央敎會)를 담임하면서 황동노회장(黃東老會長)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44년 4월 박경구(朴敬俅) 목사와 황주군 일대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전도사들을 중심으로 황해도 정방산(正方山)에서 독립운동을 모의했다는 ‘정방산사건(正方山事件)’으로 붙잡혀, 평양형무소에서 1년여 간 옥고를 치르고,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여 풀려났다. 1948년 월남하여 「토마스목사기념전도회」를 조직하고, 옹진(甕津)·연백(延白) 등의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하였다. 1949년 황남노회(黃南老會)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에 피선되었다. 1951년 9월부터 인천 제2교회를 개척하여 작고할 때까지 시무하였다. 1952년 기독교봉사회 한국지부 중앙위원, 1953년 세브란스의과대학 재단이사로 있으면서 마르다 모자원을 설립해 운영하였다. 1954년 황남노회장에 재선되었고, 1957년 11월 인천 제2교회에서 증경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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