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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奭鍾

奭鍾

1860. 10. 20 ~ 1921.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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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奭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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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광주(廣州)계몽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광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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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13도유약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을사5적 처단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60년 10월 20일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대왕면(大旺面) 자곡리(紫谷里, 현 서울특별시 강남구 자곡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이며, 자는 성려(聖呂), 호는 해전(海田)이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척화파(斥和派)로 청(淸)에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던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의 11대 종손으로 증조부는 이인장(李寅長), 조부는 이관하(李觀夏), 부친은 이범일(李範一)이다. 1888년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8위로 급제하였고, 이후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성천군수(成川郡守)·승지(承旨)·비서승(秘書丞)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조약 체결이 무효임을 주장하고 파기를 촉구하였다. 같은 해 11월 24일에는 강원형(姜遠馨) 등 13도유약소(十三道儒約所) 유생들과 함께 을사늑약 철폐와 을사5적 처단을 주장하고 민족항쟁을 계속할 것을 요구하는 연명상소를 올려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3월 나인영(羅寅永, 일명 羅喆)·오기호(吳基鎬) 등 30여 명과 함께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을사5적을 처단하는 의거에 참여하였다. 이 의거는 1907년 2월 13일·3월 18일·3월 21일 몇 차례에 걸쳐 시도되었으나, 을사5적의 예상 이동 경로 이탈과 대원들의 현장 집결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하였다. 이에 다시 3월 25일 을사5적의 출근길에 의거를 단행하기로 하고, 대원들을 5개조로 편성하여 길목에 매복하다가 사동(寺洞, 현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서 권중현을 저격하였으나 명중시키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후 대원들은 해산하여 다시 의거를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함께 참여한 강상원(康相元)·서창보(徐彰輔) 등이 붙잡혀 일망타진의 우려가 있자, 1907년 4월 1일 나인영·오기호·김인식(金寅植) 등 주도층이 평리원(平理院)에 자진 출두하였다. 이후 총 31명과 함께 붙잡혀 1907년 7월 3일 평리원에서 유형 10년을 받았다. 이때 “김동필의 요구에 응하여 간신(奸臣) 처단장 7장을 써주었다”는 것이 유죄판결의 이유였다. 을사5적과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등 총 7명을 처단한다는 일명 ‘참간장(斬奸狀)’은 김동필을 거쳐 나인영에게 전달되어 을사5적 처단 의거의 실행을 천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이 일로 1907년 7월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철도(鐵島)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다시 전남 완도(莞島)로 이배(移配)되었다. 1908년 3월 법부(法部)에서 징계를 면하는 청의(請議)를 내각에 제출하여 나인영·오기호·이기 등과 함께 유배에서 풀려났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해외로 망명하여 러시아에서 2년여 정도 머물렀다. 그러다가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를 거쳐 허룽현(和龍縣) 덕신구(德新溝) 금곡촌(金谷村)에 정착하였지만, 이후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없다. 족보에 의하면 1941년 만주에서 사망한 후 그곳에 안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1910년 15세로 함께 망명했던 아들 이규철(李揆哲)이 1918년 안투현(安圖縣) 사방원자(四方原子)에서 사립 제1민국소학교(第一民國小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서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고, 1919년 단지결사대(斷指決死隊)를 조직한 후 참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함경북도 경성(鏡城)에서 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 조직을 구축하고 활동하다가 붙잡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또한 고국에 남아있던 아들 이규동(李揆同)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완남부원군 이후원의 사패지(賜牌地)인 종토(宗土)를 몇 차례에 걸쳐 처분해 마련한 자금을 만주로 보내 그와 이규철이 계속 독립운동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일제는 그의 집안을 이른바 대표적인 ‘불령선인(不逞鮮人) 가정’이라고 하면서 지속적으로 압박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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