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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觀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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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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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觀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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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삭주(朔州)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삭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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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평북독판부
  • · 통의부
  • · 정의부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2) 평안북도 삭주군(朔州郡) 구곡면(九曲面) 수풍동(水豊洞) 출신이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이관실(李寬實)을 사용하였다. 1919년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 삭주군 서기로 활동한 이후, 통의부(統義府)·정의부(正義府)의 교통부 주임위원과 정의부 중앙행정위원 등을 역임하며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직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의 평북독판부 삭주군 서기(書記)로 임명되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평북독판부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콴뎬현(寬甸縣) 홍통구(弘通溝)에 본부를 둔 대한청년단연합회와 연계해, 부원들이 수시로 압록강을 넘나들며 항일활동을 펼쳤다. 따라서 평북독판부 소속의 다른 군(郡)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삭주군은 콴뎬현 동문(東門)밖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활동하였다. 1919년 10월 중순경 국내로 잠입해 고향 후배인 이찬수(李燦秀)를 만나 상하이(上海)에 있는 대한적십자회의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국내에서 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로 보내도록 하였다. 한편, 만세운동 전후 서·북간도에 성립된 많은 독립군단들은 여건이 갖추어지는 대로 유격대를 구성해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일제는 1920년 10월 약 20,000명에 이르는 병력을 서·북간도에 침입시켰다. 그리고 1920년 10월과 11월 두 달 동안 일본군은 3,700명에 가까운 한인을 살해하고, 3,600여 채에 이르는 가옥·학교·교회 등을 파괴하는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을 일으켰다. 이듬해 4월 일본군이 철수하자 망가진 기지와 한인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먼저 지도자들은 독립운동계의 통합운동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1922년 8월 남만주에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성립되었다. 평북독판부가 통의부에 합류함에 따라, 교통부 주임위원에 임명되어 관할 지역내 한인사회를 중앙과 서로 연계하는 업무와 지방조직을 만드는 일을 수행하였다. 주임위원으로 석성경(石聖慶)과 함께 통의부 성립 초기부터 둥펑현(東豊縣)·시펑현(西豊縣)·시안현(西安縣)·카이위안현(開原縣)·류허현(柳河縣) 등에 형성된 한인 마을을 돌아다니며 총관과 구를 설치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하였다. 동시에 한인 청년들을 부원 또는 의용군 대원으로 가입시키는 일에도 열성을 다하였다. 이후 이념과 노선의 차이로 1923년 초 복벽주의(復辟主義)계 인사들이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고 통의부를 이탈하였다. 그리고 1924년 상반기에는 보다 적극적인 항일무장활동을 추진하고자 하는 채찬[(蔡燦), 이명 백광운(白狂雲)]·김원상(金元常) 등이 임시정부 인사들과 논의한 뒤 임정 산하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만들고 나갔다. 그러자 통의부 잔류파들은 외부 인사들과 합의해 다시 남만주지역 한국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추진하였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광정단(光正團)·의성단(義成團) 등 8개 단체가 통합해 1924년 11월 24일 정의부를 탄생시켰다. 정의부 중앙조직은 3권 분립에 입각한 자치조직과 항일활동을 전개할 의용군을 편성한다는 조직표를 만들어 1925년 3월 7일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이때 통의부에서와 같은 직책인 교통부 교통과 주임위원에 임명되었다. 이는 평북독판부 시기 이후 남만주 각 지역을 돌아다녀 지리에 익숙한데다, 여러 지역 한인 사회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정의부는 1925년 후반 행정기구인 중앙행정위원회와 입법기구인 중앙의회간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행정위원 중 일부가 임시정부 파견원인 오영선(吳永善)·이유필(李裕弼) 등 두 사람을 만나 참의부 성립 과정에서 틀어진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지만, 이를 의회에서 반대하였다. 이 분란으로 행정위원회는 불신임되고 의회는 해산되었다. 그리고 이를 수습하기 위한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가 만들어졌다. 이때 송학천(宋學天)·이동국(李東國)과 함께 대임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대임위원회는 행정 당국을 감시하고 재정을 검사하며 당국의 필요한 요구를 승인하고, 행정위원회 개최가 불가능할 때 그 사무를 대행하는 직권을 가졌다. 대임위원회 후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송학천·김성진(金成鎭) 등 13명과 함께 정무원(政務員)에 임명되어 내홍으로 혼란에 빠진 조직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6년 8월에는 정의부 중앙행정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는 중앙행정위원에 선임되었다. 고활신(高豁信)·김학선(金學善)·김탁(金鐸)·오대영(吳大泳)·김정제(金定濟) 등 5명이 위원이었으나, 오대영과 김정제가 사임하여 이동림(李東林)과 함께 신임중앙위원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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