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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

金基洙

미상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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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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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순천(順川)계몽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순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동청년단
  • · 안동 협동학교
  • · 최성천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평안남도 순천(順川)에서 태어났다. 본명이 김기수(金箕壽)이다.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1909년 남형우(南亨祐)·안희제(安熙濟)·이원식(李元植)·신백우(申伯雨)·김태희(金泰熙)·김동삼(金東三)·이시열(李時說)·박중화(朴重華)·배천택(裵天澤) 등 80여 명의 동지와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법학과(法學科)를 졸업하고, 서울의 광신상업학교(廣信商業學校) 교사를 거쳐 1910년 경북 안동군 천전면의 협동학교(協東學校) 교감으로 부임하였다. 1907년 설립된 협동학교는 안동 지방의 혁신 유림 김동삼과 유인식(柳寅植)의 열성으로 향교·서원·문중재산이 투입되었으며, 김동삼과 보성전문학교에서 교유하였던 안희제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사망시기를 확정할 수 없다. 단 다른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행적이 확인된다. 1910년 협동학교의 교감으로 재직 중 실천한 교육 방침은 계몽운동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방침은 보수적인 유림이나 의병의 직접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10년 7월 18일 오후 3시경 안동·예천·영주 등 경북 북부 지역 일원에서 활동하던 최성천(崔聖天) 의병부대의 습격을 받아 협동학교 교사 안상덕(安相德), 서기 이종화(李鍾華)는 즉시 목숨이 끊어졌고, 이때 좌우 겨드랑이(脇部)와 머리 부분(頭部)에 각 1발의 총상과 24곳을 칼로 난자당한 뒤 5~6시간 후에 절명(絶命)하였다. 그가 안상덕과 함께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향 각지에서 안동의 보수 유림을 성토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심지어 대구 지역의 청년들은 모험연설단(冒險演說團)을 조직하였다가 경찰로부터 해산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협회(大韓協會) 대구지회(大邱支會)는 성토문(聲討文)을 발표하였으며, 『황성신문(皇城新聞)』에서는 논설을 실어 안동 지역의 교육이 다시 일어나고 문화가 발전하여 완고수구(頑固守舊)의 기풍에서 깨어나라고 질책하였다. 출신 학교인 보성전문학교의 동창회원들이 발의하여 유해를 서울로 운구하고 오학회연합회(五學會聯合會)와 합동으로 장례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1910년 8월 2일 영구(靈柩)는 대구를 거쳐 상오 12시 남대문에 도착하였다. 보성전문학교와 보성중학의 교사 및 학생, 그리고 기독교계 다수의 인사가 포함된 수천 명의 조객이 참석하였다. 5학회연합회 대표로 남궁훈(南宮熏)과 이달원(李達元)의 조사가 있었고, 고아원 음악대가 선도하는 가운데 보성중학교 운동장에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장례 후 왕십리(往十里)에 있는 예수교 묘지에 안장되었고, 안상덕은 마장리(馬場里)로 운구하여 선각적인 유림의 애도 속에 장례를 치렀다. 한편, 『독립유공자공훈록』제1권에는 1919년 3·1운동 때에는 은산(殷山)에서 천도교 교구장으로 있으면서 이 지역의 3·1운동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고 잘못 기재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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