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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元

東元

1921. 10. 28 ~ 1984.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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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東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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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박천(博川)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박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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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조선학생동지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21년 10월 28일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덕안면(德安面) 이봉동(二峰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이세민(李世民)·장곡선인(長谷善人)을 사용하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재학하였다. 1930년대 말경 일제의 전시체제 하에서 전국적으로 40여 개의 항일학생결사가 있었다. 그러나 학원 사찰이 점점 강화되어 큰 규모의 조직은 불가능하였고, 소수의 인원으로 조직된 결사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라는 항일학생결사를 조직하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9년 12월, 동교생 김상흠(金相欽)·김재황(金在璜)·서영원(徐泳源)·김영하(金永河)·민영로(閔泳魯)등과 함께 사직동에 있었던 윤주연(尹柱淵)의 집에 모였다. 이들은 항일운동을 위한 조선학생동지회 결성에 뜻을 모으고, 거사를 계획하였다. 조선학생동지회는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고, 해외유학생과의 교류를 통해 거국적인 거사가 될 수 있도록 활동하였다. 그 후 동지들과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남한산성·냉천동약수터·연희전문학교 뒷산·벽제관 등 비밀유지를 위해 장소를 바꿔가며 모임을 갖고 항일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한편, 동지규합 및 조직 확대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41년 7월에 조선학생동지회의 하부 조직인 원산상업학교 조직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 해 9월경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연희전문학교에서도 퇴학당하게 되었다. 붙잡힌 후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1943년 3월에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는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 연희전문학교에서는 이러한 공로를 기려 추가졸업장을 수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최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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