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배
金根培1847. 7. 15 ~ 1910. 12. 1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경술국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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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47년 7월 15일 전라북도 이리읍(裡里邑) 모현동(慕縣洞)에서 아버지 김현교(金顯敎)와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광원(光元), 호는 매하(梅下)이다. 7세 무렵부터 백재(栢齋) 김상호(金尙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조승옥(曺玉承)에게 사사받아 시문을 익혔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토적의거격문(討賊義擧檄文)」을 지어 의병을 모집하여 전쟁에 참여하고자 하였으나 프랑스군이 조기에 물러나면서 뜻을 거두었다. 1906년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가 되었으나 1908년 단발령 소식에 “부모가 남겨주신 몸을 훼손하고 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을 바꾸어 오랑캐 풍속을 쫓는 것은 차마 못하겠다”라고 하며 은둔하였다. 나주·김제·옥구 등지에서 은거하면서 젊은이들에게 항일 정신과 독립 정신을 일깨우며 유학 공부에 힘을 쏟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고 일제가 지역의 원로들과 지식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은사금(恩賜金)을 교부할 때 지역의 명망 있는 학자였기에 회유 대상이 되어 은사금이 교부되었다. 그해 12월 익산 주재 헌병소장을 통해 은사금이 전달되자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원수의 돈은 받지 않겠다” 하며 수령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회유와 포섭이 수없이 계속될 것을 알고 죽음을 결심하였다. “갑오년(1894) 이후부터 나라에 온갖 변괴가 발생하였다고 할 만하다. 우리 임금의 위호(位號)가 아직 있었을 때는 임금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나라의 강토를 이미 빼앗기고 임금의 위호 또한 없어져 버렸으니 이것은 참으로 군신이 사직을 위해 함께 죽어야 할 때다. 또 이른바 은사금은 내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의(義)를 들어 이 은사금을 받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감옥에 가두고 머리를 깎을 것이다. 모욕을 받은 후에 죽는 것보다 모욕을 받지 않고 죽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내가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 저 은사금을 받으라는 증표는 곧바로 돌려보내라”라는 유서를 아들 김종호(金鍾昊)에게 남기고, 또 그 의지를 절명시(絶命時)로 표현하였다. 만약 더러운 원수의 돈이 내 몸에 이른다면 생(生)과 의(義)를 함께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굴욕을 받고 사느니 차라리 의(義)를 따르는 것이 나으니 깨끗한 우리 집 우물에 인(仁)이 있도다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는 뜻의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1910년 12월 13일 돌을 끌어안고 자신의 집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 순절하였다. 그가 순절하자 일제는 아들 김종호에게서 유서를 빼앗고, 집에 빈소마저 차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의 순절이 마을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 항일 의식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민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의로운 선비로 추앙받았다. 또 제자들과 아들 김종호 등은 1931년 매곡사(梅谷祠, 전북 익산시 모현동)를 건립하여 그를 배향하며 애국충절을 기리고 있다. 유해는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 129호에 안장되어 있다. 저술로는 『매하유고(梅下遺稿)』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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