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李灌鎔

灌鎔

1891. 7. 15 ~ 1933. 8. 13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灌鎔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서울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서울특별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파리위원부
  • · 한국 공보국
  • · 대한적십자사
  • · 소년척후단조선총연맹발기회
  • · 조선기근구제회
  • · 화요회
  • ·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부
  • · 조선사정연구회
  • · 신간회
  • · 신간회 경성지회
  • · 재만동포옹호동맹
  • · 북만조선농민개척사
  • · 조선어사전편찬회
  • · 철학연구회

포상 정보

  • · 애국장(2008)

관련 사건

  • · 갑산 화전민 사건
  • · 언론탄압비판 대연설회
  • · 광주학생운동
  • · 민중대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8) 1891년 7월 15일 서울 종로(鐘路)에서 이재곤(李載崑)의 4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이며, 대한제국 관료로서 일명 ‘정미 7적’ 가운데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일성(一星)이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이관용(李灌溶·李瓘鎔·李鑵鎔) 등을 사용하였다. 1904년경까지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907년 관립한성학교(官立漢城學校)를 중퇴하고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갔다. 도쿄부립(東京府立) 제4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역시 중퇴하고 1910년 귀국하였다. 일본 유학 당시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3년 3월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를 졸업하고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4년 3월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하여 정치사를 전공하였다. 1916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1년간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1917년 스위스의 취리히대학에 입학하여 철학을 전공하였다. 1921년 8월 27일 「의식의 근본 사실로서 의욕론」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이탈리아를 거쳐 독일 베를린대학 자연과학과에서 동물학을 연구하였으며, 1922년에는 독일 예나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철학을 연구하였다. 스위스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 중이던 1919년 3월 국내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중국 상하이(上海)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의 요청으로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이후 정식으로 임시정부의 신임장을 받고 파리위원부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 김규식과 함께 활동하였다. 같은 해 3월 13일 김규식이 파리에 도착 직후 한국 공보국(公報局)을 설치해 강화회의에 제출할 한국 독립에 관한 탄원서 등을 작성하고 『공보국회보』를 발간했는데, 공보국의 모든 사무와 김규식의 보좌 역할을 전담하였다. 김규식·여운홍(呂運弘)·조소앙(趙素昻)·황기환(黃玘煥) 등과 함께 대표단 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였다. 국제사회주의자 회의인 루체른 회의에 참석하기를 바라는 서신을 프랑스어로 작성해 대회 의장 앞으로 발송하여 참가 자격을 얻었다. 같은 해 7월경 조소앙과 함께 한국사회당 대표로 국제사회당 대회에 참가하여, 한국의 현재 상황과 독립의 필요성 등에 대해 설명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영문으로 작성한 「한국독립 승인 요구안」을 제출하였다. 같은 해 8월 9일 미국으로 건너간 김규식의 뒤를 이어 파리위원부 위원장 대리로 활동하다가, 10월 10일 임시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사직 인준을 받고 사임하였다. 이 사이에 「독립청원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으며, 대한적십자사 대표 자격으로 만국적십자회(萬國赤十字會)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20년 1월 대한적십자사 구주지부장(九州支部長) 자격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적십자회에 참석하여, 일본적십자사에 대한 항의서를 제출하였다. 이 항의서는 각지로 발송되었으며, 국제적십자회 기관지에도 게재되었다. 같은 해 4월 프랑스 한인의 3·1운동 기념식에 축전을 보냈다. 같은 해 10월 12일 윤해(尹海)와 함께 국제연맹옹호회(國際聯盟擁護會) 연합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에 갔다. 1920년 5월부터 1921년 5월까지 파리위원부 통신국에서 발행한 월간지 『자유한국(La Corée Libre)』의 편집진으로 활동하였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던 1921년 6월 20일 임시정부에서 국무회의를 열어 독립을 선전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에 파견할 것이 결정되었다. 1922년 벨기에, 네덜란드, 폴란드 등을 시찰한 후 11월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1월 25일 샌프란시스코 유학생회에서 개최한 환영 만찬회에 참석하였다. 1923년 2월 17일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같은 달 28일 조선여자교육협회 주최 강연회에서 「여자의 사회생활에 관하여」, 3월 2일 전조선청년당대회 주최 강연회에서 「신생활」, 4월 15일 불교대회강연회에서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읽고」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24년 3월 1일 이상재(李商在)를 총재로 소년척후단조선총연맹발기회(少年斥候團朝鮮總聯盟發起會)를 조직하고 이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7월 12일 평양천도교회당에서 열린 동아일보사 평양지국 주최 강연회에서 「정신적 단체인 국민」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민족은 타민족에 동화되지 않으며 독립은 당연하다는 내용으로 강연했다가 연설 중지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경 조선기근구제회(朝鮮饑饉救濟會)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2월 23일부터 김준연(金俊淵)과 함께 『동아일보』의 러시아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모스크바를 시찰하였다. 모스크바 체재 당시 사상단체 화요회(火曜會)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7월에 귀국했는데, 귀국 도중 상하이에 들러 이시영(李始榮) 등과 회견하였다. 같은 해 10월 30일 개성(開城)의 송도고등보통학교(松都高等普通學校) 교우회 주최로 「역사적 유물론」에 대해 강연하였다. 같은 해 11월 28일 윤치호(尹致昊)를 위원장으로 한 태평양문제연구회(太平洋問題硏究會) 조선지부를 조직하고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여기에서 종교·경제·이민·외교 문제를 연구하며, 하와이 범태평양회의에 상주위원을 파견할 것 등을 협의하였다. 같은 달 30일 사회 각 방면의 유지들이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한국의 사회·가정, 상업·공업·농업재정, 금융·법제·교육 문제 등을 학술적으로 조사 연구하였다. 1926년 3월 신인동맹(新人同盟)에서 사회주의에 대해 강연하고, 4월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 주최 칸트 탄생 202주년 기념 강연회에서 「칸트의 도덕철학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연희전문학교와 동아일보사를 퇴임하고 시대일보사 부사장이 되어 언론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1월 잡지 『현대평론』을 창간해 경영하면서 주간(主幹)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1월 19일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2월 15일 단체를 결성하고 간사와 학생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경 신간회 경성지회(京城支會) 제2회 정기대회에서 임시집행부 서기장에 선임되었으며, 같은 달 8일 「신간회의 발전상황」을 주제로 강연하였다. 같은 달 10일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 집행위원회에서 홍명희(洪命熹)·김기전(金起田)과 함께 성명서 작성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신간회 도쿄지회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 도쿄에 파견되었으며, 출장에서 돌아온 직후인 1928년 3월 6일 신간회 총무간사회에서 이에 대해 보고하였다. 같은 달 26일 신간회 진주지회 강연회에서 「민족적 총역량을 집중하자」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같은 해 6월 15일 조선교육협회 정기총회에서 이사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7월 2일 신간회 해주지회 1주년 기념식에서 「부분과 전체」, 같은 달 21일 개성 고려청년회(高麗靑年會) 주최 학술대강연회에서 「개체의 존재 이유」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8년 10월부터 『조선일보』의 난징(南京) 특파원으로서 중국을 시찰하였다. 같은 해 11월 다롄(大連) 감옥에 수감된 신채호(申采浩)를 면회하였다. 같은 해 12월경 주요한(朱耀翰)·안창호(安昌浩)와 협의하여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북만조선농민개척사(北滿朝鮮農民開拓社) 결성을 논의하고, 1929년 2월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9월 7일 신간회 경성지회 강연회에서 「조직의 의의」, 12월 3일 「중국국민당 분열식(分列式)」을 주제로 강연하였다. 같은 해 10월 31일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 발기총회에 참여하여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7월에 일어난 ‘갑산(甲山) 화전민(火田民) 사건’에 대한 신간회의 대응 과정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언론탄압비판 대연설회’가 금지를 당하자, 김병로(金炳魯)·황상규(黃尙奎)와 함께 항의위원이 되어 총독부 당국에 ‘갑산 화전민 사건’과 언론탄압에 항의하였다. 이어서 같은 해 11월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간회 차원에서 일제 당국의 한국인 학생 탄압에 대해 진정하고 비판연설회를 개최하기로 하자, 조사부장으로서 이를 준비하였다. 또한 간부들과 함께 12월 13일 민중대회 개최하기로 하고 당일 연설자로 선정되었으며, 결의문 배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1929년 12월 23일 허헌(許憲) 등 10명과 함께 검찰로 송치되었다. 1930년 1월 이 가운데 허헌·홍명희·조병옥(趙炳玉)·이원혁(李源赫)·김무삼(金武森) 등 5인과 함께 예심에 회부되었다. 1931년 4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은 뒤, 2년 2개월 만인 1932년 1월 22일에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이후 『조선일보』 편집고문, 철학연구회(哲學硏究會) 회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철학과 관련된 다수의 학술논문과 신문·잡지에 글들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