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德均
德均1879. 10. 17 ~ 1955. 8. 2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용인군 수지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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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9년 10월 17일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수지면(水枝面) 고기리(古基里, 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고, 1911년부터 고기리의 이장으로 활동하던 중 1919년 3월 29일 수지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용인 지역에서는 3월 21일 원삼면에서 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후, 원삼면을 중심으로 3월 28일부터 4월 2일까지 집중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이러한 만세시위 소식이 용인의 각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3월 28일부터 30일까지 사흘 동안 용인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용인군 수지면의 만세운동은 수지면 고기리의 안종각(安鍾珏)이 서울에서 배포된 독립선언문을 입수하면서 시작되었다. 안종각은 만세운동의 취지에 동의하여 고향인 수지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방법을 고민하면서 이를 함께 계획할 동지를 규합하였다. 3월 28일 밤,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안종각이 비밀리에 찾아와 수지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안하였다. 안종각은 “이미 우리 민족은 궐기하였소. 일제를 몰아내어 자손만대 광명한 조국에서 우리 자손들을 영유케 하려면, 우리의 생명이라도 받쳐야 할 때요. 여기 손병희(孫秉熙)·이갑성(李甲成), 그리고 우리 용인 출신의 김완규(金完圭) 선생 등이 서명한 독립선언문이 있소”라고 하며, 자신이 입수한 독립선언문과 그동안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던 태극기를 꺼내 제시하였다.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읽어본 후, 곧바로 만세운동에 찬성하여 안종각과 다음날인 3월 29일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안종각과 논의하여 고기리를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시작해서 인근의 동천리(東川里)·풍덕천리(豊德川里) 등으로 행진하여 수지면 전역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논의 후, 고기리의 이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마을 주민들을 규합하였다. 동리의 사환을 통해 고기리의 각 마을에 “내일 아침 각 동리에서 1명씩 나와 나라의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에 참여하라”고 통보하였다. 3월 29일 아침 100여 명의 고기리 주민들이 모였다. 오전 9시경부터 안종각으로부터 전달받은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안종각과 함께 큰 목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만세위에 참여한 주민들이 한 목소리로 호응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기세가 오른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동천리로 행진하였다. 고기리의 만세시위대가 동천리에 도착하자, 전날 안종각에게 연락을 받고, 만세시위 참여를 기다리고 있던 300여 명의 동천리 주민들이 고기리 주민들의 외침에 회답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안종각과 함께 선두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5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된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수지면사무소가 위치한 풍덕천리로 행진하였다. 오전 11시 30분경부터 수지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격렬하게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대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행진할 때마다 만세시위대의 모습을 보고, 이들이 외치는 ‘조선독립만세’의 구호를 듣고, 이에 공감한 주민들이 속속 만세시위대에 결합하였다. 수지면사무소 앞에서의 만세시위를 마친 후, 안종각과 함께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행진의 방향을 읍삼면(邑三面) 마북리(痲北里)로 잡고, 다시금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때에 만세시위 발생 보고를 접한 일제 헌병대가 출동하여 만세시위대를 가로막고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를 무시하고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를 지속하자, 일제 헌병대는 곧바로 만세시위대를 향해 총기를 발포하며 만세시위를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의 중심 인물로 지목되어 붙잡혔다. 이날 안종각은 일제 헌병대의 총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렇게 주도자를 잃은 만세시위대는 일제 헌병대의 무력 진압으로 오후 2시경에 해산되었다. 이날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어 1919년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서대문감옥에 갇혀 옥고를 겪던 중 일제가 시행한 만세운동에 대한 ‘은사(恩赦)’에 의해 1920년 4월 28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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