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基先
基先1887. 10. 15 ~ 1919. 4.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홍천군 내촌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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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87년 10월 15일 강원도 홍천군(洪川郡) 내촌면(乃村面) 물걸리(物傑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기선(李基善)이다. 천도교인으로 1919년 4월 3일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희생되었다. 물걸리는 영동과 영서의 물화가 활발하게 교류하는 상업상 요충지이면서 내륙 교통의 중심지로서 상설시장·주막과 마방(馬房)·상업용 창고 등이 설치되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천도교 장두(狀頭) 김덕원(金德元), 부장두 전성렬(全性烈), 전우균(全祐均)·전영균(全榮均) 등과 함께 천도교인들을 규합하며 물걸리에서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그리고 다른 주도자들과 장터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전영균의 다락방에 모여 만세시위에서 사용할 대형 태극기 3점과 군중들에게 나누어 줄 작은 태극기 300점을 직접 그렸다. 또한 물걸리 외에도 이웃한 와야리(瓦野里)·문현리(文峴里), 화촌면(化村面)의 장평리(長坪里), 서석면(瑞石面)의 수하리(水下里), 인접한 인제군(麟蹄郡) 기린면(麒麟面)의 상남리(上南里)와 내면(內面)의 방내리(坊內里) 등지에도 만세시위 계획을 알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하였다. 한편,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4월 1일과 2일에 홍천면(洪川面)과 동면(東面)에서 각각 만세시위가 있을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거사일을 4월 3일로 정하였다. 만세시위 전날인 2일 같이 준비하던 이장(里長) 김홍이가 계획을 누설하면서 헌병보조원 홍재호(洪在浩)와 윤모(尹某)가 장터에 나타났다. 두 사람이 장터를 돌며 염탐한다는 소식을 들은 김덕원과 전성렬이 이들을 만나서 비밀로 할 것을 부탁하였지만, 오히려 훈계하며 꾸짖자 창고에 가두었다. 홍재호와 윤모는 밤에 간신히 탈출한 후, 다음날 만세시위를 막기 위하여 준비하였다. 4월 3일 아침 주도자들과 함께 약속 장소인 전영균의 한약방에 모였다. 정오 무렵 한약방에 태극기를 걸고 전영균·김자희(金自喜) 등과 함께 대형 태극기를 높이 들고 장터 가운데로 나아갔고, 양도준(梁道俊)이 징을 울려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전성렬이 만세시위의 사회를 보았고, 김덕원은 개회 연설에서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어서 전우균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문순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문순의 선창에 1,000여 명의 시위 군중들과 함께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마친 후, 면사무소와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가 있는 도관리(道寬里)로 향하였다. 이때, 잠복하고 있던 일제 헌병들이 나타나 공포를 쏘며 시위대를 저지하였다. 일제 헌병들의 무력에도 시위대가 행진을 멈추지 않자, 홍재호·박연흥(朴連興) 등 헌병 7명이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이때 전영균·양도준·이순극(李順克)·김자희·연의진(延義鎭)·이여선(李麗先)·전기홍(全基弘)과 함께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함춘선(咸春先)·승만수(承萬壽) 등 2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결국 시위대가 흩어지면서 만세시위도 끝이 났다. 광복 이후 물걸리 만세운동의 ‘팔열사(八烈士)’로 칭송을 받았고, 1963년 4월 2일 팔열사를 기리는 팔열각(八烈閣)이 세워졌다. 1991년 물걸리 일대에 ‘기미만세공원’이 조성되었고,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동창기미만세운동기념비(東倉己未萬歲運動紀念碑)」가 건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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