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淇錫
淇錫1893. 5. 21 ~ 1947. 8.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3)
관련 사건
- · 1919년 창녕군 영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3) 1893년 5월 21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교리(校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기식(李琪植)이다. 1919년 당시 천도교인이었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 해 3월 13일 영산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영산면 만세운동을 주도한 구중회(具中會)는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에서 수학하며 서울의 천도교 인사들과 교류하였고, 이들로부터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 등의 문서를 받아 귀향하였다. 그리고 구중회는 창녕에서도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천도교인과 영산공립보통학교(靈山公立普通學校) 출신 학생들을 중심으로 동지를 모집하였다. 이때 천도교인으로서 구중회의 권유를 받고 뜻을 같이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영산면 남산(南山)에서 구중회·남경명(南慶明) 등 23명과 함께 결사대를 결성한 이후 3월 1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운동 계획을 수립하였다. 3월 13일 오후 1시 남산에서 다른 결사대원들과 함께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내용의 선서를 하고 서약서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오후 2시부터 구중회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전개된 만세시위에 앞장서서 징을 치며 만세를 외치고, ‘전진가(前進歌)’를 부르면서 읍내를 향해 행진하였다. 이때 100여 명의 군중이 함께 읍내를 순회하며 만세를 외쳤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미리 대기하던 일제 경찰이 만세시위 행렬을 인솔하던 구중회·남경명·장진수(張振秀) 등을 체포해 압송하였다. 다른 결사대원들과 협의하여 체포된 인사들을 구출하기로 하고, 오후 8시경 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창녕경찰서로 행진하였다. 이후 계성면(桂城面)의 계성교(桂城橋)에서 행렬을 막아선 일제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투석전을 전개하다가 해산하였다. 영산면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6월과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하지만 담당 검사가 만세시위 참여자들에게 집행유예 처분을 내린 것이 부당하다며 1심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다. 같은 해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만세운동이 제령이 시행된 4월 1일 이전의 일이며 집행유예의 사유 또한 없다는 이유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집행유예 없이 다시 징역 6월을 받아,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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