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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根文

根文

1862. 4. 18 ~ 1929.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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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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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天安)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천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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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천안군 갈전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1862년 4월 18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수신면(修身面) 복다회리(卜多會里, 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촉발한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이 소식을 접한 충남 천안에서도 유관순(柳寬順)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1919년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葛田面, 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의 병천(竝川)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는 병천과 수신면 및 성남면(城南面) 지역의 만세운동 준비 흐름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시위대를 향한 일제 헌병들의 무차별적인 발포가 자행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두 지역의 만세운동 준비가 동시에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먼저 만세운동을 준비한 지역은 병천 지역으로, 3월 13일 서울에서 귀향한 유관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월 16일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柳重權)과 숙부 유중무(柳重武) 및 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이백하(李伯夏) 등 지역의 인사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병천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유한 결과 이들의 동의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모임에서 아우내장터의 장날인 4월 1일을 만세시위의 거사일로 결정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수신면과 성남면 지역에서는 3월 29일부터 만세운동 논의가 이루어졌다. 고종(高宗)의 인산(因山) 참례 과정에서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 이순구(李旬求)와 홍일선(洪鎰善)이 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圭)·이백하 등과 논의한 끝에 거사가 계획된 것이다. 그 결과 4월 1일 아우내장터의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별도로 진행된 두 개의 만세시위 계획은 3월 말 병천 지역에서 만세운동 준비의 연락책으로 활동한 김상훈(金相勳)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었다. 3월 31일 밤 매봉산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 수신면 산마루, 충북 진천(鎭川)의 고갯마루에 봉화가 올랐다. 이것은 다음날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신호였다. 전날 밤의 봉화를 통해 예정대로 만세시위가 진행될 것임을 확인하고, 4월 1일 아침 아우내장터로 출발하였다. 조병호(趙炳鎬)·조만형(趙萬衡)·박봉래(朴鳳來) 등으로부터 태극기를 받아 옷 속에 숨기고 장터로 들어가 만세운동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오후 1시 조인원이 장터의 한가운데 대형 태극기를 세운 다음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곧이어 유중권·유중무·조병호 등이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제히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품속에 감추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고야마(小山) 소장 이하 5명의 일제 헌병들이 곧바로 출동하였다. 현장에 도착한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3,000여 명의 만세시위대 앞에 5명의 일제 헌병들은 중과부적이었다. 해산에 불응한 시위대가 더욱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당황한 일제 헌병들은 무차별 발포를 가하게 되면서 시위대 중 김상헌(金相憲)이 현장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평화롭게 전개되던 만세시위에 일제 헌병이 무분별한 총칼로 대응하자 시위대는 분노하여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시위열기가 고조되었다. 시위대와 함께 돌을 던져 주재소의 유리창을 깨고, 일제 헌병의 발포에 대해 책임을 추궁을 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처음의 계획과 달리 만세시위의 양상이 폭력시위로 발전하자, 조인원이 나서 평화시위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사상자의 발생으로 격앙된 시위대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또 다시 총검을 휘둘렀으며 그 과정에서 유관순이 부상당하고, 그의 부친 유중권이 사망하였다. 계속적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더 이상 분노를 자제할 방법이 없었다. 김교선·한동규·이백하·이순구·김상철(金相喆) 등의 지휘에 따라 1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곧장 주재소로 쳐들어가 기물을 파괴하고, 유치장 벽을 부숴 구금자를 구출하였다. 시위대와 일제 헌병이 충돌하는 동안 지원 요청을 받고 급파된 일제의 천안철도엄호대원 6명이 오후 4시 아우내장터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병천의 헌병주재소와 합세하여 만세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여 만세시위를 강제 해산시키면서 주도자들과 적극 참여자들을 붙잡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제 헌병에 붙잡혀 천안헌병분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은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년과 벌금 20원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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